2015. 3. 10. 20:58ㆍ문화재를찾아서/인물한국사
고려의 개국공신
왕건을 구하고 전사하다
후일담
그리고 역시 대구 파군재 삼거리 근처에 표충단이 있으며[1]묘는 춘천에 있다. 참고로 춘천의 신숭겸 묘에 가면 정말로 봉분이 세 개가 있는데 그것은 위에 언급된 황금으로 만들어진 머리가 도굴되지 않기 위함이라는 설과 그냥 부인을 함께 안장했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전설에 따르면 오늘날 신숭겸이 묻힌 곳은 원래 왕건 자신이 묻힐 곳으로 봐 둔 명당 자리 중 하나였는데 자신의 목숨을 구한 신숭겸을 위해 양보한 것이라고 한다.
대중 매체에서
공산 전투에서 전사한 후 견훤이 눈을 부릅 뜬 그의 목을 보자 식겁하는 장면은 아무리 봐도 삼국지연의의 조조가 관우의 수급을 보는 장면의 패러디인 것 같지만 아니다. 조조가 관우의 목을 보고 놀라는 것은 관우의 목이 입을 벌리고 있었기 때문이지만 그것보다는 오랫동안 아꼈던 사람의 죽음을 두 눈으로 확인하고 충격을 받은 것이다. 하지만 견훤이 신숭겸의 목을 보고 놀란 것은 틀림없이 '왕건 아우' 의 목일 거라고 여겼던 것이 실은 전혀 엉뚱한 사람의 목임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즉, 서로 전혀 다른 상황이다. 적국의 왕이나 장수를 베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목을 베어오는 것이고 예상과는 달리 전혀 엉뚱한 사람의 수급이 도착하여 놀라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다만 견훤은 왕건에 대해 딱히 증오심은 없었고 오히려 적국의 왕이었지만 궁예의 수하 시절부터 탐내던 인재였다. 오히려 왕건과는 애증의 관계였던 것이다. 견훤과 왕건의 특별한 관계와 목이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는 점에서 조조가 관우의 목을 놀라는 장면에서 어느 정도 영향을 받았을 수도 있다.
생생애와 활동사항
몸집이 장대하고 무용(武勇)이 뛰어나 궁예(弓裔) 말년에 홍유(洪儒)·배현경(裵玄慶)·복지겸(卜智謙)과 함께 혁명을 일으켜 궁예를 몰아내고 왕건(王建)을 추대해 개국일등공신(開國一等功臣)에 봉해졌다.
또한 그의 아우 능길(能吉)과 아들 보장을 원윤으로 삼았고, 지묘사(智妙寺)를 새로 세워 그의 명복을 빌게 하였다. 대구에는 아직도 파군재, 독좌암, 왕산, 안심, 해안, 반야월, 백안, 연경, 살내 등의 많은 지명이 남아 있어, 당시의 격전지임을 알 수 있다.
현재 강원도 춘천시에는 신숭겸 장군의 묘역이 조성되어 있으며 묘역에는 묘와 묘비, 신도비, 사당, 영정, 동상이 있고, 묘에는 봉분이 세 개가 있어 특이한 형태로 되었다.
1805년에 김조순이 비문을 짓고, 신위가 글씨를 쓴 신도비에 의하면 봉분이 3개가 있는데 대하여 두가지설이 있으니 그 하나는 신숭겸이 전사하자 견훤의 후백제군들이 목을 베어 갔으므로 고려 태조는 순금으로 두상(頭像)을 만들어 시신과 같이 매장하고 어느 것에 시신이 있는지 분간하기 어렵게 하여 도굴을 방지하려 하였다고 하고, 다른 하나는 신숭겸의 부인 묘라고 전해지는데 그 사실 여부는 알 수 없다고 기록하였다.[1]
한편 일찍이 숭겸이 태조를 따라 삼탄에 사냥을 나갔을 때에 마침 세 마리의 기러기가 나는 것을 보고 태조가 말하는 대로 셋째 놈의 왼쪽 날개를 쏘아 맞췄다.
태조가 크게 칭찬하고 평주(平州 : 평산)라는 본관을 주고 기러기를 쏜 근방의 밭 3백 결(結)을 주어 자손 대대로 조(租)를 받게 하였으니, 이 땅을 궁위(弓位)라 불렀다.
출처 : 엔하위키미르.위키백과.한국민속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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