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주/조선의 무신 임경업 장군 묘소

2014. 8. 29. 22:12문화재를찾아서/한국사기행

-조선의 무신 임경업 장군 묘소-

지난 7월 중순 충주를 거처 지방을 가던차 임경업 장군 묘소가 충주에 있다는것을 알고 취재를 하기위해 시간을 할애 했던 시간 이었다.

그럼 임경업 장군에 대하여 알아 보기로 합니다.

 

1594(선조 27)~ 1646(인조 24). 조선 중기의 무신. 

친명반청(親明反淸)에 투철한 무장으로서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때 활약했으며, 청나라와 화의가 성립된 이후에도 명나라와 협력하여 청을 공격하려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음을 당했다. 본관은 평택(平澤). 자는 영백(英伯), 호는 고송(孤松). 판서 정(整)의 7대손으로, 아버지는 황(葟)이다. 1618년(광해군 10) 아우 사업(嗣業)과 함께 무과에 급제했다. 1620년 소농보권관(小農堡權管)을 지내고, 1622년 첨지중추부사를 거쳐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 때 정충신(鄭忠信) 밑에서 세운 공으로 진무원종공신(振武原從功臣) 1등에 봉해지고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다. 그뒤 우림위장(羽林衛將)·방답첨사(防踏僉使)·낙안군수 등을 지냈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전라병사 신경인(申景禋)의 좌영장으로 출전, 강화도로 갔으나 이미 화의가 성립된 뒤여서 후금군과의 전투는 없었다. 이듬해 체찰부별장, 1629년 용양위부호군, 1631년 검산산성방어사·정주목사 등을 거쳐, 1633년 청북방어사 겸 안변부사에 기용되어 백마산성(白馬山城)·의주성(義州城)을 수축했다. 같은 해 명나라의 공유덕(孔有德)이 반란을 일으켜 후금군과 합세하려 하자, 명군과 함께 이를 토벌하여 명나라의 왕으로부터 총병(摠兵) 벼슬을 받았다. 1634년 의주부윤 겸 청북방어사에 임명되었으며, 중국무역과 둔전(屯田) 개설의 공로로 이듬해 가의대부(嘉義大夫)에 올랐다. 무역거래에서 폭리를 취했다는 탄핵으로 한때 파직되었으나, 곧 복직하여 압록강 맞은편의 송골산(松鶻山)·봉황산(鳳凰山)에 봉화대를 설치하는 등 국경경비를 강화했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백마산성에서 청군을 차단하고자 했으나, 청군이 우회하여 남하했으므로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 이듬해 인조로부터 굴욕적인 강화를 받아내고 돌아가던 일부 청군을 쳐서 무찔렀다. 1637년 청나라가 가도(椵島)에 주둔한 명군을 공격하기 위하여 조선에 병력을 요청하자 수군장(水軍將)으로 출전했으나, 병자호란 때의 치욕을 씻을 기회를 노리던 그는 명의 심세괴(沈世魁)에게 연락하여 몰래 명군을 도왔다. 이듬해 평안도병마절도사 겸 안주목사가 되었으며, 1640년 다시 청나라의 요청으로 주사상장(舟師上將)으로 발탁되어 금주위(錦州衛)의 명군을 공격했지만 이때도 마찬가지로 승려 독보(獨步)를 보내 명군과 연락을 취하면서 한 번도 싸우지 않았다. 1641년 서울로 돌아왔으나, 그의 행적에 의심을 품고 있던 청의 압력으로 벼슬에서 쫓겨났다가 곧 행동지중추부사(行同知中樞府事)로 복귀했다. 그러나 1642년 명장(明將) 홍승주(洪承疇)가 청나라에 투항함으로써 명과의 관계가 발각됨에 따라 체포되었다. 청나라로 압송되던 도중에 황해도 금천군 금교역(金郊驛)에서 탈출, 회암사(檜巖寺)에 들어가 스님이 되었다가 1643년 명나라에 망명했다. 그뒤 명나라 장군 마등고(馬騰高)와 함께 석성(石城)에서 청나라 공격에 나섰으나 마등고가 곧 항복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고 탈출을 기도하다가 그의 부하였던 한사립(韓士立)의 밀고로 잡혀 1645년 베이징으로 압송되었다. 이무렵 조선에서 심기원(沈器遠)의 옥사가 일어나 그의 관련설이 대두되자 1646년 인조의 요청으로 송환되었다. 그는 역모사실을 부인했으나, 김자점(金自點)·원두표(元斗杓)가 강력히 처벌을 주장, 심문을 받던 중 형리(刑吏)에게 장살(杖殺)되었다. 사후 그의 무용담을 소재로 한 〈임경업전 林慶業傳〉을 비롯하여 많은 소설·설화가 전해지고, 토속신앙의 대상으로 신격화되었다. 1697년(숙종 23) 복관되었다. 충주 충렬사(忠烈祠), 선천 충민사(忠愍祠)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민(忠愍)이다. 도움:브리테니커

 

 

어제달천충렬사비, 충청북도 유형문화제 제272호, 임충민공충렬사, 충청북도 충주시 단월동

임충민공충렬사, 사적 제189호, 충청북도 충주시 단월동

 

임충민공충렬사, 사적 제189호, 충청북도 충주시 단월동

 

 

 

임경업전 [林慶業傳]

조선 인조 때의 장군 임경업의 생애를 전기형식으로 엮은 작품이다. 〈님장군전〉·〈림경업전〉·〈임충신전〉 등 여러 이본이 있다. 목판본 3종과 활자본이 전한다. 정조의 명으로 만들어진 임경업 관련 자료집 〈임충민공실기 林忠愍公實記〉를 토대로 거기에 민간설화가 더해져 윤색된 작품으로 보인다. 충주 달천촌에서 태어난 임경업은 25세에 무과에 급제, 사신을 따라 중국에 가게 되었는데 호국이 가달의 침략을 받아 명나라에 장수를 요청하자 임경업이 대신 출전하여 물리친다. 그뒤 호국이 강성해져 조선을 위협하자 조정에서는 임경업을 의주부윤으로 삼는다. 호국군은 임경업을 두려워하여 함경도 쪽으로 돌아 쳐들어와 서울을 공격, 인조가 항복하기에 이른다. 이 소식을 듣고 임경업은 돌아가는 호국군을 공격하려 하나 인질로 잡힌 세자의 만류로 할 수 없이 그만둔다. 호국왕은 명나라를 치겠다면서 임경업을 대장으로 보내달라고 요청한다. 김자점이 적극 나서서 조정에서는 임경업을 보내게 되었는데, 임경업은 호국으로 가던 중 호송하던 병사를 죽이고 머리를 깎고 중으로 변장하여 명나라로 간다. 그는 명나라군과 힘을 합해 호국을 치려고 하나 간계에 걸려 호국으로 잡혀가게 된다. 호왕은 임경업의 인품과 충절에 감탄하여 죽이려던 계획을 포기하고 조선으로 돌려보낸다. 돌아온 임경업은 김자점의 음모에 말려들어 원통한 죽음을 당한다. 인조는 꿈에 나타난 임경업의 얘기를 듣고 김자점을 잡아 죄를 묻고 처형한다. 임진왜란·병자호란을 겪은 뒤의 척외사상(斥外思想)이 이 소설의 바탕이 되고 있으며, 전기적 요소가 많은 다른 군담소설에 비해 비교적 역사적 사실에 충실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나라가 어려울 때에 뛰어난 영웅의 출현을 바라는 민중의 소망이 반영된 작품으로 볼 수 있다.

 

 

 

임경업장군 묘, 충청북도 기념물 제67호, 충청북도 충주시 풍동

 

 

 

 

 

 

조선 16대 인조 14(1636)에 청나라 태종이 우리나라를 침입했다. 이때 조선에서는 의주 부윤 임경업(林慶業)장군이 의주국경을 지키고 있었다. 임경업 장군의 용맹성과 뛰어난 전술을 청나라 태종도 익히 들어 알고 있었기 때문에 청나라 군사는 의주를 피해 돌아서 다른 길로 서울을 공격했다. 적군이 의주를 피해 지나갔다는 것을 알아차린 장군은 급히 군사들과 함께 도성으로 오려 하였으나 십만 대군을 도저히 당해낼 수가 없었다. 격렬한 싸움이 계속 되었으나 결국 패배하여 인조 임금께서 청 태종 앞에 무릎을 끊고 세 번 절을 하고 아홉 번 머리를 숙이며 항복을 하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청 태종은 조선이 명나라와의 관계를 끊고 청나라에 대하여 신하의 예를 다하도록 요구했다. 청 태종은 돌아갈 때 소현세자(昭顯世子)와 봉림대군(鳳林大君)을 볼모로 잡아갔다. 이 소식을 들은 임경업 장군은 땅을 치며 거듭 탄식하며 말했다. “이 오랑캐 놈들, 내 이 원수를 꼭 갚으리라.”

 

충성심이 강한 임경업 장군은 병자호란의 치욕을 씻고 두 왕자를 모셔 올 생각에 노심초사했다. 마침내 장군은 명나라와 조선이 청나라 몰래 힘을 합친다면 청나라를 무찌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명나라로 가야 하는데 만주를 통해서 가는 길은 모두 청나라 군사가 막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방도를 찾아야했다. 결국 바다로 갈 수밖에 없어서 장군은 상인으로 변장하고 떠나기로 했다. 그러나 장군과 함께 이 어려운 길을 동행할 상인을 구할 수가 없었다.

 

어느 날 한양 마포에서 서성이던 장군은 쌀장사를 크게 하는 사람을 찾아갔다. 이 쌀장수는 어찌나 욕심이 많던지 돈을 벌기 위해서는 무슨 짓이든 하는 사람으로 소문이 나 있었다. 장군은 쌀장수의 그런 점을 이용하여 그에게 다가가, “주인장, 큰돈을 벌어 보고 싶지 않소?”

쌀장수는 큰돈을 번다는 소리에 귀가 번쩍 뜨여 장군에게 어찌하면 큰돈을 벌 수 있느냐고 되묻는 것이었다. 장군은 이때다 싶어 자신과 동업을 하면 큰돈을 벌 수 있다 했다. 그리고 이곳은 곡물 값이 싸니 그 곡물을 가지고 의주로 가 팔면 큰돈을 벌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쌀장수는 장군의 말이 그럴 듯하여 당장 함께 가자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며칠 뒤 커다란 배에 많은 양곡을 싣고 서해로 나가 의주로 향할 수 있었다. 배는 며칠간 순조롭게 나아갔다. 그런데 배가 의주로 가지 않는 것을 알아차린 뱃사람들이 모두 겁을 먹고 안가겠다고 아우성이었다. 그러나 임경업 장군의 추상같은 명령에 더 이상 항의하지는 못했다.

 

상인들과 선원들은 배 한 구석에 앉아 어떻게 하면 뱃머리를 돌릴 수 있을까 궁리를 하다가 한 상인이 꾀를 내었다. 연료나 식량이 떨어지면 천하의 임경업 장군도 어찌할 수 없이 되돌아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상인들은 장군 몰래 먹을 양식과 물, 장작 등을 모두 바다에 던져 버렸다. 장군에게 가서 식량과 장작이 모두 떨어져서 이대로는 어디도 갈 수 없으니 육지에 배를 대고 먹을 물, 식량들을 구해 다시 떠나자고 했다. 임경업 장군은 이들이 육지에 닿는 즉시 돌아가려는 속셈을 알아차리고는 한참을 생각한 후에 배를 가장 가까운 섬 연평도에 대라고 했다.

 

배가 섬에 닿자 장군은 먹을 물로 소 연평도와 연평도 사이에 있는 바닷물을 담으라 했다. 상인들은 바닷물은 짜서 먹을 수도 없는데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곳의 바닷물은 짠 소금물이 아닌 마실 수 있는 민물이었다. 장군은 땔감은 산에서 구하라고 했다. 그러나 식량을 구할 방도가 없었다. 장군이 선원들에게 가시나무(엄나무)를 많이 꺾어 오라 했다. 선원들이 가시나무를 꺾어 오자 장군은 그것을 간조 때에 맞추어 안목 어장터에 꽂아 놓으라고 했다. 선원들이 생각하기에 장군의 명령은 납득하기 힘든 것이었다. “이렇게 한들 없던 식량이 생기나?”

그러나 선원들은 시키는 대로 했다. 다시 물이 나가는 간조가 되자 장군은 선원들에게 어장 터에 나가 보라고 했다. 놀랍게도 가시나무의 가시마다 수많은 고기가 걸려 있는 것이었다. 장군은 이 고기를 양식으로 삼아 명나라로 계속 갈 수 있었다. 이렇게 임 장군이 잡는 방법을 처음 알아내어 잡은 물고기가 조기였다. 연평도 사람들은 그 후로 조기 잡는 법을 알게 되어 지금까지 조기를 많이 잡아서 생계를 잇고 있다.

임경업 장군은 후에 청나라 군사에게 잡혀 억울하게 죽는 몸이 되었지만 장군이 연평도에서 가시나무를 이용하여 조기를 잡은 일화는 조기잡이의 시초로 두고두고 전해 온다. 연평도 근해에서는 파시가 열릴 만큼 조기가 아주 많이 잡혔다. 참고: 인천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