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창덕궁 후원 나들이 부용지&주합루

2014. 9. 1. 22:04문화재를찾아서/한국사기행

창덕궁 후원 제1의 정원 부용지와 주합루

 

8월의 마즈막날 하늘은 구름이 드리운날 따가운 햇쌀은 없었지만 나름 해설사와 숨가쁜 일정을 소화 하는 시간 이었다.

말로만 듣던 조선 정원의 아름다움을 맞볼수 있었던 소중한 시간을 걸어본다.

비가내린후의 부용지의 물은 진한 황토색으로 변해 있었지만 나름 우리의 보물을 볼수 있었던 소중한 시간 행복함은 더할나위 없었다.

 

보물 제1763호 창덕궁 후원 부용지  

창덕궁에서 후원으로 가는 길은 현재는 내의원으로 불리는 건물군을 왼쪽으로 끼고 담으로 좌우를 막은 통로를 이용하게 된다. 이 통로는 약간 오르막길로 되어 있으며 길은 좌측으로 꺾이면서 내리막길로 변하는데 그 지점에서 부용지 일대의 모습이 내려다보인다. 3면이 경사지이며 경사가 모이는 한가운데에 방형(方形)의 연못인 부용지가 있다. ‘부용(芙蓉)’은 ‘연꽃’을 뜻하는데, 창덕궁 후원의 대표적인 방지(方池)이다. 동서 길이가 34.5m,남북 길이가 29.4m에 이르는 방형의 연못이다.

부용지의 네모난 연못과 둥근 섬은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는 천원지방(天圓地方)사상을 반영한 것이다. 연못은 장대석으로 쌓아올렸고, 남쪽 모서리에는 물고기 조각이 하나 있다. 잉어 한마리가 물 위로 뛰어오르는 모습을 새겼는데, 이것은 왕과 신하의 관계를 물과 물고기에 빗댄 것이다.

이 연못의 남쪽 변에 부용정이 자리 잡고 있는데, 부용정의 남쪽은 낮은 언덕에 면하고 있다. 현판이 걸려 있는 동쪽이 건물의 정면인데, 이는 이곳의 지형이 남·북·서 삼면이 낮은 언덕으로 둘려있고, 동쪽만이 훤하게 트여 있기 때문이다.

건물주변을 보면 남쪽 언덕에는 3단의 화계(花階)를 설치하고 꽃을 심고 수석을 배치하여 정원을 꾸며 놓았으며, 북쪽 연못에는 가운데에 섬 하나를 쌓고 그 뒤로 높은 언덕에 어수문(魚水門)과 주합루(宙合樓)일곽이 보이도록 하였다.

주합루의 왼쪽으로는 서향각(書香閣)이 있으며 주합루의 뒤 2단의 석대 위에 제월광풍관(霽月光風觀)이라는 편액의 작은 건물이 있다. 서향각의 뒤 높은 곳에 희우정이 있다. 연못의 서측에는 서정기비각(西井記碑閣)이 있다.

부용정은 궁궐지에 따르면 조선 숙종 33년(1707)에 이곳에 택수재(澤水齋)를 지었는데, 정조 때에 이를 고쳐 짓고 이름을 ‘부용정(芙蓉亭)’이라 바꾸었다고 한다.『동국여지비고』에는 “주합루 남쪽 연못가에 있다. 연못 안에 채색하고 비단 돛을 단 배가 있어, 정조 임금께서 꽃을 감상하고 고기를 낚던 곳이다”라고 하여 이곳에서 왕이 과거에 급제한 이들에게 주연을 베풀고 축하해 주기도 했으며, 신하들과 어울려 꽃을 즐기고 시를 읊기도 하였는데, 1795년 수원 화성을 다녀온 정조가 신하들과 낚시를 즐겼다고 전한다. 기둥에는 이곳의 풍광을 읊은 시를 적은 주련(柱聯)10개가 걸려 있다.

부용정의 평면은 정면 5칸, 측면 4칸, 배면 3칸의 누각으로 연못 남쪽 위에서 봤을 때 열 십(十)자 모양을 기본으로 구성되었으며, 남동과 남서쪽에 반칸을 덧대서 소통을 원활히 하였다. 남북 중심축을 기준으로 할 때 동쪽과 서쪽이 좌우대칭이다. 연못 안에 2개의 팔각 석주를 세운 다음 그 위에 가느다란 원기둥을 세우고 건물의 비례에 맞게 앙증맞은 2익공(二翼工)공포를 짜 올렸다. 정자안은 네 개의 방을 배치했는데, 배면의 방이 다른 방들보다 한 단계 높다. 지붕은 겹처마 팔작지붕의 단층이다.

외관을 보면 북쪽은 간결하고 남쪽은 화려한 형식을 취하고 있어 보는 위치에 따라 다양한 형태가 나타나며, 풍부한 형태미를 강조하기 위해서 난간과 창호도 위치에 따라 다양한 형식을 취하고 있다.

난간은 평난간과 계자난간(鷄子欄干)을 두었는데, 특히 북쪽 연못 부분의 난간은 다른 곳보다 한단 높게 하여 변화를 주었다.

창호를 보면 외부 창은 연못으로 내민 부분에만 亞자살문을 달고, 그 밖의 다른 곳은 모두 띠살문 으로 하였으며, 들쇠에 매달면 사방으로 트이게 되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내부에는 정자살문과 팔각형 교살창을 낸 불발기창을 두어 안팎 공간의 구분을 분명하게 하였다.

부용정은 창덕궁 후원 초입에 천원지방의 조형원리에 따라 조성한 대표적 연못인 부용지에 지은 마루식 정자로 연못에 인접하여 자연의 선경을 인공적으로 만들어, 풍류를 통해 수양을 하는 한국 정자건축의 대표적 작품이다.

열십(十)자 모양의 독특한 평면 형태, 공간구성, 건물의 장식 등이 뛰어난 비례와 대비로 건물의 아름다움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는 건물로 역사적, 예술적, 건축적으로 보존가치가 높다. -문화재청-

 

 

입장권을 끊은 인파들의 출입을 스타트 하고 있다.

 

 

출입구의 느티나무 숲이 하늘을 가리고 있다.

흔히 이 느티나무 숲을 일컬어 낮에도 별을보는 비유를 나타내고 있음을 알수 있다

빼곡한 느티나무 잎이 가려진 하늘을 보면 그만큼의 우거진 사의의 촘촘한 모습 사이로 작은 빛을 볼수 있다.

그래서 밤을 비유하듯 별밤을 볼수 있다고 표현 하고 있다.

 

 

 

 

 

 

 

 

 

 

보물  제1769호 주합루

창덕궁 후원에 부용지와 부용정, 영화당, 주합루가 있는데 이 중에서 북쪽에 주합루가 위치하고 있다. 주합루 주변은 3단의 화계(花階)에 정원을 꾸며 놓았으며, 화계 첫 단에는 어수문(魚水門)을 두고 주합루에 오를 수 있도록 하였다. 주합루의 정문인 어수문은 임금을 물에, 신하들은 물고기에 비유하여 군신의 융화적 관계를 함축한 뜻이 담겨져 있다. 어수문은 임금이, 그 옆 작은 문(협문)은 신하들이 출입하였다.

창덕궁 주합루(昌德宮宙合樓)는 정조 즉위년(1776) 창덕궁 후원에 어제·어필을 보관할 목적으로 건립한 2층 건물이다. 기단은 네벌대의 장대석을 바른층 쌓기하고 맨 위의 갑석에는 쇠시리를 넣어 마무리하였다. 건물은 정면 5칸, 측면 4칸의 2층 건물로 기둥은 모두 상하층 통주로 사용하였고, 사방을 외부 기둥에서 1칸씩 물려서 퇴를 두었으며, 내부는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구성하였다. 공포는 궁궐에서 전형적으로 사용되는 이익공으로 주두와 익공살미, 행공이 짜여지고 그 위에 재주두가 놓이며 운공으로 장식되어 있으며, 처마는 부연을 둔 겹처마이고,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용마루와 내림마루는 양성바름으로 마감하였고 용마루 끝에는 취두를, 내림마루에는 용두를, 추녀마루에는 잡상과 용두를 얹어 권위가 높은 건물임을 나타내고 있다.

정조의 정책개발과 개혁정치, 조선 중기 문예부흥의 산실로서 정약용과 박제가, 유득공, 이덕무 등 다양한 인재들이 활동하던 중요한 공간이며, 정조가 지은 어제와 어필, 어진, 인장 등을 보관하였던 장소로 그 원형이 잘 남아있어 역사적 가치가 높다. 또한 건물은 경사진 높은 지형에 배치하여 자연과 조화를 이루도록 하였으며, 1층은 왕실도서 보관에 적절한 퇴와 사분합 들문을 설치하였고 내부는 온돌을 두었다. 2층 열람실은 사방의 빼어난 경관을 조망할 수 있도록 배치하는 등 건물의 기능에 맞는 실 배분이 충실히 반영되었다. 이처럼 주합루는 역사적, 건축사적 가치가 높다.

 

 

 

 

 

 

 

 

 

 

 

 

 

 

 

영화당-

영화당은 부용지 동쪽에 있는 건물이다. 「궁궐지」에는 언제 지어졌는지 알 수 없다고 하였으나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에 이 영화당을 짓는일을 논의하는 내용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광해군 때 처음 지어진 것으로 볼 수있다. 지금의 건물은 1692(숙종 18)년에 재건한 것이다. 이 건물의 앞쪽 마당은‘춘당대(春塘臺)’라고 불리는 곳으로 이 곳에서 왕이 직접 참석한 가운데 과거시험이 실시되었다. ‘영화시사(暎花試士)’는 후원의 뛰어난 열 가지 경치를 이르는 상림십경(上林十景) 중의 하나이다. 상림십경의 열 가지는 각각 관풍춘경(觀?春耕: 관풍각에서의 봄갈이), 망춘문앵(望春聞鶯: 망춘정에서 꾀꼬리 소리듣기), 천향춘만(天香春晩: 천향각의 늦봄 경치), 어수범주(魚水泛舟: 어수당),소요유상(逍遙流觴: 소요정 물굽이에서 술잔 띄우고 마시기), 희우상련(喜雨賞蓮: 희우정에서의 연꽃 구경), 청심제월(淸心霽月: 청심정에서 보는 개인 날의 맑은 달), 관덕풍림(觀德楓林: 관덕정의 단풍), 영화시사(영화당 앞에서 시험 보는 선비들), 능허모설(凌虛暮雪: 능허정의 저녁 눈)이다. 정조가 상림십경을 읊은 칠언 절구가 『홍재전서』에 전한다.

고전 소설 「춘향전(春香傳)」에서 이몽룡이 과거 급제할 때 시험 본 장소도 이곳 춘당대이며 이 때 글제가 ‘춘당춘색고금동(春塘春色古今同)’이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지금은 마당 앞쪽에 창경궁과 경계를 나누는 담장이 둘러쳐 있는데 원래는 창경궁과 경계가 없이 터져 있었으므로 창경궁의 춘당지(春塘池)가 춘당대와 하나의 공간을 형성하였다.

영화당은 왕과 신하들이 연회를 베풀거나 활을 쏘기도 한 정원이었는데, 정조때부터 과거 시험장으로 이용하였다. 영화당에서는 왕이 참석한 가운데 시관(試官)이 자리하여 시제를 내리고, 춘당대에서 초시(初試)에 합격한 응시자들이 마지막 시험을 보았다.

『궁궐지』에 의하면 영화당 건물 안에는 선조, 효종, 현종, 숙종의 편액이 걸려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남아 있지 않고 영조의 친필인 ‘暎花堂(영화당)’ 현판만 남아 있다. 갑술년(甲戌年)에 썼다고 되어 있으니 1754(영조 30)년에 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