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창덕궁 후원 나들이 불로문, 애련지, 의두합

2014. 9. 2. 22:16문화재를찾아서/한국사기행

-애 련 정-

부용지 지역을 조선의 정원 2를 향하는 발걸음은  더욱 산뜻한 기분이었다.

조선 최고의 왕실의 사랑을 받았던 창덕궁 후원의 정원인 만큼의 왕의 걸음으로 걸어 보는 참다운 조선의 역사를 읽어 보는 시간 이었다.

 

 

숙종18년(1692년)에 만들어진 연못과 정자이다. 숙종은 『애련정기(愛蓮亭記)』에서 '연꽃은 더러운 곳에 있으면서도 변하지 않

고 우뚝 서서 치우치지 아니하며 지조가 굳고 맑고 깨끗하여 군자의 덕을 지녔기 때문에 이러한 연꽃을 사랑하여 새 정자의 이름을 애련정이라 지었다'고 밝히고 있다.

 
 애련지()창덕궁 불로문을 지나 왼쪽에 자리하고 있고, 애련지 북쪽에 서 있는 간결한 정자가 애련정()이다.  애련지는 부용 '연꽃이 피는 연못’이라는 뜻인 애련지(지와 달리 가운데 섬이 없는 방지()로, 사방을 장대석으로 쌓아올렸다. 입수구가 독특한데, 흘러내리는 도랑물을 물길을 따라 폭포수처럼 떨어지게 만들었다. 원래는 연못 옆에 어수당()이라는 건물이 있었으나,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애련정은 숙종 18년(1692)에 애련지의 물가에 지은 것으로, 정면 1칸, 측면 1칸의 이익공의 사모지붕 양식을 띠고 있다. 일반 건물에 비해 추녀가 길며 추녀 끝에는 잉어 모양의 토수가 있다. 물 기운으로 불 기운을 막는다는 음양오행설에 기초한 것이다, 건물을 받치는 네 기둥 가운데 두 기둥은 연못 속에 잠겨 있는 초석 위에 세워져 있다. 정자 사방으로 평난간을 둘렀는데, 낙양창 사이로 사계절이 변하는 자연을 감상할 수 있다. ‘애련’이라는 이름은 송나라의 유학자 주돈이가 쓴 ‘애련설()’이라는 시에서 유래했다. 숙종이 지은 ‘애련정기()가‘궁궐지()’에 전한다.

 

 

 

 

 

 

 

 

 

 

 

 

금마(金馬)’는 ‘쇠붙이로 만든 말’이라는 뜻이다. 원래 금마문은 중국 한나라 때 대궐 문의 이름으로, 문 옆에 동(銅)으로 만든 말이 있었으므로 ‘금마’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또 ‘금마’는 한나라 때 국가에서 책을 갈무리하던 곳의 이름이기도 했다. 기오헌이 책을 비치하던 곳이므로 한나라의 전통을 따라 이름을 붙인 것으로 보인다.

 

 

원래 동진의 시인 도연명(陶淵明,

365~427년) 3)의 「귀거래사(歸去來辭)」 중 “남쪽 창에 기대어 호방함을 부려 보니[寄傲], 좁아터진 집이지만 편안함을 알겠노라.”<원전 2>라는 구절에서 따온 말이다. 원래 이름이었던 의두합과 기상(氣像)이 서로 통하는 명칭이다.

 

 

 

 

 

『궁궐지』에는 의두합(倚斗閤)이라고 나오는 건물이다. 의두합은 수많은 책을 비치하고 독서하던 곳이다. 『궁궐지』에 따르면 “영화당 북쪽에 있으며 예전에 독서처가 있던 자리인데 1827(순조 27)년에 익종이 춘저(春邸) 1)에 있을 때 고쳐 지었다.”<원전 1>고 하였다. ‘의두(倚斗)’는 『동국여지비고』에 의하면 “북두성에 의거하여 경화(京華) 2)를 바라본다.”는 뜻이다. 정면 4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민도리 집이다.

 

 

-불로문-

 

불로문은 하나의 통돌을 깎아 세운 문으로 임금이 무병장수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고 있다

왕의 장수를 기원하는 뜻에서 세워진 문으로 창덕궁 연경당으로 들어가는 길에 세워진 돌문이다. 세로판석에 돌쩌귀 자국이 아있는 것으로 보아 원래는 나무문짝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한다. 이 문을 지나가는 사람은 무병장수한다고 전해진다.  ‘궁궐지’에 의하면, 불로문 앞에는 불로지()라는 연못이 있었고, 그 앞에 불로문이 있어 왕의 무병장수를 기원하였다고 한다. 문은 하나의 판석을 ㄷ자 모양으로 깎은 뒤 다듬은 것이다. 문의 윗부분에 전서체로 불로문이라 새겨져 있다. 지금의 불로문은 창덕궁 궁궐 배치도인 ‘동궐도()’에 나와 있는 모습과 일치하지만 주변 풍경은 그림과 많이 다르다. 마치 종이로 오려낸 듯한 단순한 형태이지만 두께가 일정하게 돌을 다듬은 기술이 세밀하다. 불로문과 잇달려 있는 담장과의 조화로움에서도 전통 조형물의 우수함을 엿볼 수 있다.

 

금마문 옆 담장의 중간, 기오헌 아래턱에 위치한 돌문이다. 쇠못을 박은 흔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본래 문이 달려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궁궐지』에 의하면 이 문 앞에 불로지(不老池)가 있었고 문 안에 어수당이 있었다고 한다.

 

 

 

 

 

천연기념물  제471호

창덕궁 뽕나무는 창덕궁의 관람지 입구 창경궁과 경계를 이루는 담 주위에 위치하며 나무높이 12.0m, 가슴높이 줄기둘레는 239.5㎝로 뽕나무로서는 보기 드문 노거수일 뿐만 아니라 창덕궁 내 뽕나무 중에 가장 규모가 크고 수형이 단정하고 아름답다.

예로부터 조선은 농본사회로 ‘농상(農桑)’이라는 말에서 전하듯 농사와 함께 뽕나무를 키워 누에를 쳐 비단을 짜는 일은 조선시대 나라의 가장 중요한 일 중에 하나였다. 나라에서는 궁의 후원에 뽕나무를 심어 가꾸며 일반인들에게 양잠을 권장하였는데, 조선조 궁에 뽕나무를 심었다는 최초의 기록은 「태종실록」(태종 9년 3월 1일)으로 창덕궁 건립 후 태종 9년(1409) 중국 주(周)나라 성왕(成王)의 공상제도(公桑制度)를 본따 궁원(宮園)에 뽕나무를 심도록 명한 것이 공식적인 최초의 기록이다.

「태종실록」 외에 「성종실록」에도 왕이 승정원에 양잠의 중요성을 말하며 후원에 뽕나무를 식재토록 하고, 후원에서 왕비가 친히 누에를 치고 인간에게 처음으로 누에치는 법을 가르쳤다는 양잠의 신 서릉씨(西陵氏)에게 제사를 지내는 “친잠례(親蠶禮)”를 거행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양잠은 예로부터 나라의 귀중한 산업으로 왕실에서는 뽕나무를 매우 중요시 여겼왔다. 1911년, 창덕궁 후원 주합루 좌측 서향각에서 조선총독부가 양잠소로 만들고 친잠례를 거행하였으며, 주합루에서도 1925년 6월 17일, 1929년 6월 15일, 1939년 6월 26일 친잠례가 거행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위의 기록처럼 창덕궁 뽕나무는 친잠례 거행 등 궁궐 역사의 일면을 보여주는 중요한 수목으로 우리가 보호 관리하여야 할 역사적, 문화적 가치가 매우 큰 소중한 문화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