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6. 5. 17:27ㆍ문화재를찾아서/한국사기행
-자연과 조화 이룬 가장 한국적인 궁궐-
-문화재청 창덕궁 인용-
창덕궁은 1405년 태종 때 건립된 조선왕조의 왕궁이다. 처음에는 법궁(法宮)인 경복궁에이어 이궁(離宮)으로 창건했지만, 이후 임금들이 주로 창덕궁에 거주하면서 실질적인 법궁의역할을 하였다. 임진왜란 때 한양의 궁궐들이 모두 불탄 후에 경복궁은 그 터가 불길하다는이유로 재건되지 않고 1610년(광해 2)에 창덕궁이 재건된다. 그 후 창덕궁은 경복궁이재건될 때까지 270여 년 동안 법궁으로 사용되었다.창덕궁은 인위적인 구조를 따르지 않고 주변 지형과 조화를 이루도록 자연스럽게건축하여 가장 한국적인 궁궐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왕가의 생활에 편리하면서도 친근감을주는 창덕궁의 공간 구성은 경희궁이나 경운궁 등 다른 궁궐의 건축에도 영향을 주었다.
조선시대에는 궁의 동쪽에 세워진 창경궁(昌慶宮)과 경계 없이 사용하였으며, 두 궁궐을‘동궐’이라는 별칭으로 불렀다. 또 남쪽에는 국가의 사당인 종묘(宗廟)가, 북쪽에는 왕실의정원인 후원(後苑)이 붙어 있어서 조선 왕조 최대의 공간을 형성했다.그러나 왕조의 상징이었던 궁궐은 여러 차례의 화재로 소실과 재건을 거치면서
많은 변형을 가져왔고 1991년부터 본격적인 복원사업이 시작되어 현재에 이르렀다. 또한1997년 12월 6일에 유네스코(UNESCO)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명실공히 한국을대표하는 궁궐이 되었다
-돈화문 일원-
규모와 품위를 함께 갖춘, 창덕궁의 정문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은 1412년(태종 12)에 건립되었다. 창건 당시 창덕궁 앞에는 종묘가 자리 잡고 있어 궁의 진입로를 궁궐의 서쪽에 세웠다. 2층 누각형목조건물로 궁궐 대문 가운데 가장 큰 규모이며, 앞에 넓은 월대를 두어 궁궐 정문의 위엄을 갖추었다.
돈화문은 왕의 행차와 같은 의례가 있을 때 출입문으로 사용했고, 신하들은서쪽의 금호문으로 드나들었다. 원래 돈화문 2층 누각에는 종과 북을 매달아 통행금지 시간에는 종을 울리고 해제 시간에는 북을 쳤다고 한다. 돈화문은 임진왜란 때전소되었다가 광해군이 즉위한 이듬해인 1609년에 재건되었으며, 보물 제383호로 지정되어 있다.
-인정전 일원-
국가의 중요한 의식을 치르던 곳 인정전은 창덕궁의 정전(正殿)으로서 왕의 즉위식, 신하들의 하례, 외국 사신의 접견 등 중요한 국가적 의식을 치르던 곳이다. 앞쪽으로 의식을 치르는 마당인 조정(朝廷)이 펼쳐져 있고, 뒤편에는 뒷산인 응봉으로 이어져 있다. 2단의 월대 위에 웅장한 중층 전각으로 세워져 당당해 보이는데, 월대의 높이가 낮고 난간도 달지 않아 경복궁의 근정전에 비하면 소박한 모습이다. 인정전은 겉보기에는 2층이지만 실제로는 통층 건물로 화려하고 높은 천장을 볼 수 있다.
바닥에는 원래 흙을 구워 만든 전돌이 깔려 있었으나, 지금은 마루로 되어있다. 전등, 커튼, 유리 창문 등과 함께 1908년에 서양식으로 개조한 것이다. 인정문 밖 외 행각(外行閣)에는 호위청과 상서원 등 여러 관청들을 두었다.
1405년(태종 5)에 창덕궁 창건과 함께 건립되었으나 1418년(태종 18) 박자청에
의해 다시 지어졌고,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610년(광해 2)에 재건, 1803년(순
조 3)에 소실된 것을 이듬해에 복원해 현재에 이른다. 외행각 일원은 1991년 이후
에 복원했다. 인정전은 국보 제225호로 지정되어 있다.
-희정당-
침전에서 편전으로 바뀌어 사용된 곳인정전이 창덕궁의 상징적인 으뜸 전각이라면 희정당은 왕이 가장 많이 머물렀던실질적인 중심 건물이라고 할 수 있다. 원래 이름은 숭문당이었으나 1496년(연산2)에 희정당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원래의 편전인 선정전이 비좁고 종종 국장을 위한 혼전으로 쓰이면서, 침전이었던 희정당이 편전의 기능을 대신하게 되었다.지금의 희정당은 1917년 화재로 소실된 것을 1920년에 복구하면서 경복궁에 있던강녕전을 옮겨 지은 것이다. <동궐도>에 그려진 원래의 희정당은 여러 개의 돌기둥 위에 세운 아담한 집이었고 마당에 연못도 있었다. 지금의 희정당은 이 모습과완전히 다르고, 원래의 강녕전과도 다르다. 재건된 희정당 내부는 쪽마루와 카펫,유리 창문, 천장에 샹들리에 등을 설치하여 서양식으로 꾸며졌다. 보물 제815호로 지정되어 있다.
못 다 핀 개혁정치의 꿈, 효명세자(孝明世子) 희정당은 순조의 아들이며 헌종의 아버지인 효명세자가 승하한 곳이기도하다. 외모와 총명함은 물론이고 책을 좋아하는 모습까지 할아버지 정조를 빼닮았다고 전해지는 효명세자. 순조의 명으로 19세에 대리청정을 시작한 효명세자는 안동 김씨 세력과 맞서 참신한 인재를 등용하고 개혁정치를 펼쳤다. 그러나 아버지의 희망, 할아버지의 이상, 그리고 조선 백성들의 염원을 채우지 못한 채 22세의 꽃다운 나이로 요절하고 말았으니,정사를 돌본 지 겨우 3년 3개월 만이었다. 효명세자는 후원에 작은 공부방인 의두합을 짓고 이곳에서 독서를 즐겼다.
-대조전 일원-
비극적 역사가 담겨 있는 침전대조전은 창덕궁의 정식 침전(寢殿)으로 왕비의 생활공간이다. 원래는 대조전 주변을 수많은 부속건물들이 에워싸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 흥복헌(興福軒)은 1910년 마지막 어전회의를 열어 경술국치가 결정되었던 비극의 현장이다. 1917년 불타 없어진 터에 1920년에 경복궁의 침전인 교태전을 옮겨 지어 현재의 대조전이 되었다. 이건하면서 창덕궁의 상황에 맞추어 재구성했는데, 대조전을 중심으로 양옆 날개채와 뒤편의 경훈각 등이 내부에서 서로 통하도록 복도와 행각으로 연결 했다. 원래 궁궐의 복합적인 구성을 잘 보여 주는 거의 유일한 부분이다. 희정당과마찬가지로 내부는 서양식으로 개조하였으며, 왕실생활의 마지막 모습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다. 보물 제816호로 지정되어 있다.
-선정전 일원-
임금의 집무실로 쓰인 곳 왕이 고위직 신하들과 함께 일상 업무를 보던 공식 집무실인 편전(便殿)으로, 지형에 맞추어 정전인 인정전 동쪽에 세워졌다. 아침의 조정회의, 업무보고, 국정 세미나인 경연 등 각종 회의가 이곳에서 매일 열렸다. 창건 당시에는 조계청이라 불렀는데, 1461년(세조 7)에 ‘정치는 베풀어야 한다’는 뜻의 선정전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임진왜란과 인조반정 등의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647년(인조 25)에 인왕산 기슭에 있던 인경궁을 헐어 그 재목으로 재건하였다. 주위를 둘러싼 행각들을 비서실, 부속실로 이용했으나 전체적으로 비좁았다. 현재 궁궐에 남아 있는 유일한 청기와 건물이다.
뒤편의 희정당으로 편전 기능이 옮겨 가면서 순조 이후에는 이곳을 혼전(魂殿, 죽은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시는 곳)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현재 보물 제 814호로 지정되어 있다
경로잔치를 열기도 했던 선정전 선정전은 원래 왕의 공간이지만 왕비가 사용한 일도 있다. 성종 때 공혜왕후 한씨가 노인을 공경하는 풍습을 권장하기 위해 양로연을 이곳에서 베풀었다. 양로연은 80세 이상의 노인 전원을 대상으로 매년 9월에 열렸다. 성종의 계비 정현왕후 윤씨는 이곳에서 친히 누에치는 시범을 보였으며, 중종 때는 내외명부의 하례를 받기도 했다. 사관들은 왕비가 편전인 선정전을 사용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비판을 남겼다.
-궐내각사-
왕과 왕실을 보좌하는 궐내 관청 관청은 대부분 궐 바깥에 있었지만, 왕을 가까이에서 보좌하기 위해 특별히 궁궐안에 세운 관청들을 궐내각사라고 불렀다. 인정전 서쪽 지역에는 가운데로 흐르는 금천을 경계로 동편에 약방, 옥당(홍문관), 예문관이, 서편에 내각(규장각), 봉모당(奉謨堂), 대유재(大酉齋), 소유재 등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들은 모두 왕을 가까이에서 보좌하는 근위 관청이며, 여러 부서가 밀집되어 미로와 같이 복잡하게 구성 되었다. 일제강점기 때 규장각, 대유재, 소유재는 단순한 도서관으로 기능이 변했다가, 그나마도 소장 도서들을 경성제국대학 도서관으로 옮기면서 규장각과 봉모당 등 모든 전각들이 헐리고 도로와 잔디밭으로 변해 버렸다. 지금 있는 건물들은2000~2004년에 걸쳐 복원되었다.
정조 개혁정치의 산실, 규장각 규장각(奎章閣)은 다른 이름으로 내각(內閣) 또는 이문원(摛文院)이라고도 했다. 정조즉위 초에 역대 왕들의 시문과 글씨를 보관하는 왕실 자료실로 지었다. 처음에는 후원에 2층 누각으로 지었으나 너무 후미져서 불편하여 1781년(정조 5)에 이곳으로 옮겼다. 왕권확립, 개혁정치, 문예부흥을 표방한 정조가 특별한 의지와 관심을쏟은 곳이기에 청사 중에서 가장 넓은 옛 도총부 건물을 차지했다. 규장각의 실무자는 문예와 학식이 뛰어난 서얼 출신들을 주로 임명하여 관직의 길을 열어 주었다. 서얼 출신으로 박제가, 이덕무와 같은 뛰어난 실학자들이 여기서 배출되었다.
고궁을 걷는길
역사의 한페이지를 읽어 가는곳
창덕궁의 역사를 훔처보는 시간 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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