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6. 8. 22:09ㆍ문화재를찾아서/한국사기행
-금번 연휴를 통한 여행은 경기 북부권 연천군을 자동차. 자전거. 도보로 여행을 했습니다-
옛날에는 최전방이요 오지로만 알았던 연천군 장남면을 비롯해 인진강을 건너본 적이 없었지만 이번 기회의 여행에서 강을 건너 유적지 사적지를 돌아 보는 시간 여행을 하면서 신라의 왕 중에 유독 경주를 떠나 외톨이로 있는 신라 마지막 왕 경순왕릉을 먼저 탐방을 하게 되었습니다.
신라시대의 왕릉. 신라 마지막 왕인 제56대 경순왕(재위 927~935)의 능이다.
높이 약 3m, 지름 7m의 원형봉토분. 능 앞에는 ‘신라경순왕지릉(新羅敬順王之陵)’라고 쓰여 있는 비석이 서 있다. 비석 앞에는 계체석(階?石)과 장명등(長明燈)이 놓여 있고 양 옆에는 돌로 만든 양과 망주석(望柱石)이 1쌍씩 서 있다. 봉분의 삼면은 담장으로 둘러쳐져 있고 봉분은 돌을 다듬어 둘레돌을 돌렸다.
다른 신라왕들의 무덤이 경주일원에 있는데 반해 유일하게 경주가 아닌 곳에 있다. 고려 경종 3년(978)에 그가 승하하자 신라 유민들이 그의 유구를 경주로 모셔가고자 하였으나 “왕의 관은 개경 백리 밖으로 나갈 수 없다” 하여 지금의 자리인 장단에 능을 조성하였다고 한다. 이를 통해 비록 망국의 왕으로 고려의 관리를 지냈지만 그를 왕으로 예우했음을 알 수 있다.
능의 위치가 처음 확인된 것은 영조 때의 일이나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며 잊혀졌다가 1973년에 다시 발견되었다
경순왕은 신라 마지막 왕으로 고려 왕건에게 나라를 내어 주고 경주를 식읍으로 받아 고려 최초의 경주 사심관이 되었다. 그리고 왕건의 딸 낙랑공주와 혼인하여 자녀를 여럿 두었다. 그러나 왕건에게 복속하는 것을 끝까지 반대했던 그의 큰 아들 마의태자는 망국의 한을 안고 금강산으로 들어갔고 막내아들 범공은 화엄사에서 스님이 되었다. 그의 딸 덕주공주 역시 덕주사에서 마애불을 세우고 아버지와 마의태자를 위해 기도하며 평생을 보냈다.
신라 56대 마지막왕인 경순왕(재위 927∼935)의 무덤이다. 927년 경애왕이 포석정에서 놀다 견훤의 습격을 받아 시해된 후 견훤에 의해 왕위에 올랐다. 전쟁으로 인해 백성이 많은 피해를 입자 군신의 반대를 무릅쓰고, 935년 평화적으로 신라를 고려에 넘겨주고 왕위를 물러난 신라 마지막 왕이다. 무덤의 높이는 약 3m, 지름 7m의 둥글게 흙을 쌓아올린 원형 봉토무덤으로 판석을 이용해 둘레돌을 돌렸다. 고려시대 왕릉에서 나타나기 시작한 담장인 곡장이 둘려져 있어 고려 왕실에서 왕의 예로서 무덤을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신라 왕릉 중 유일하게 경주 지역을 벗어나 경기도에 있다.
경순왕릉으로 가는 길
경순왕릉 추정 신도비각
-경순왕릉 추정 신도비-
경순왕릉 신도비라고 전해지는 대리석대의 비석이 비각 안에 세워져 있다. 이 비석은 원래 고랑포구 주변에 방치 되다가 11976년 고랑포 초등학교로 옮겨 놓았다고 한다.
1748년(영조 24)후손들이 발견한 신도비로 추정하여 1986년 비각을 짓고 이곳으로 옮겨 놓은 것이다. 비의 마모상태가 심하여 현재 한쪽면에서만 몇개의 문자만 판독될 정도여서 내용은 전혀 알수 없다. 비석의 건립 연대는 모르지만 비석의 형태로 보아 조선 초기의 것으로 추정 된다는 것이다.
싱라의 왕릉이 여기 연천 장남 최전방에 있을줄은 전혀 몰랐던 터라 갑자가 머리가 멍 했습니다
경순왕 고려의 왕이었던가 생각하는 시간이 무척이나 길었던 시간 이었습니다
경순왕은 신라 마지막 왕이었다는 이론적 가치를 알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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