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산/구국의 영웅 이순신장군께서 잠들어 계신 민족의 성지 이충무공 묘소

2014. 5. 24. 10:32문화재를찾아서/한국사기행

-이충무공 묘소李忠武公墓所-

사적 제112호

현충사를 탐방 하던중 이충무공의 묘소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세째 이면공의 묘소와 그 후대들의 묘소만 있었으며 안내에 따른 답은  지금 쓰는 포스팅의 위로에 있다는 사실을 안내받고 바로 이곳 이충무공의 묘소로 이동하여 탐방 하게 되었습니다.

 

1598년 11월 19일(양력 12월 16일)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공의 유해는 최후의 진지였던 고금도에 일단 모셔졌다가 이듬해인 1599년 2월 운구되어 인근 아산시 음봉면 금성산에 장사 되었으며 순국 16년 뒤인 1614년 이곳 어라산으로 이장 되었습니다.

이충무공의묘소는 1959년 5월 22일 사적 제 122호로 지정되어 1973년 7월 19일부터 충무공 종손의 동의를 얻어 현충사관리소에서 묘역을 관리해 왔었다. 묘는 충무공의 배위인 상주방씨와의 합장으로 모셔져 있습니다.

 

문화재청에서는 이곳 이충무공의 묘소에서  위토 모내기 체험행사를 진행 신청을 받고 있습니다.

 

 

 

 

문화재청에서는 이곳 이충무공의 묘소에서  위토 모내기 체험행사를 진행 신청을 받고 있습니다.

 

주차는 외부  주차장을 이용하고 걸어서 이충무공 묘소를 향합니다 필자 외에도 다른분들도 함께 진입을 합니다.

 

 

묘소입구의 광장 입니다

 

 

이충무공 묘소 안내도 입니다

 

한산도가(閑山島歌)

한산도월면야상수루(閑山島月明夜上戍樓) 한산섬 달밝은 밤에 수루에 홀로 앉아

무대도심수시(撫大刀深愁時) 큰칼 옆에차고 깊은 시름 하는 차에

하처일성강적갱첨수(何處一聲羌笛更添愁) 어디서 일성호가는 남의 애를 끊나니

저만치 홍살문이 보입니다

 

 

홍살문을 통과 합니다

 

이순신 장군의

충무공 이순신 장군은 1545년 4월 28일(음력 3월 8일) 서울 건천동(현 인현동)에서 아버지 이정과 어머니 변씨 사이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덕수, 자는 여해 이다. 공은 어린시절 가족과 함께 외가가 있는 아산으로 이주하여 성장하고 혼인 하였으며 활쏘기 등 무예에 연마함은 물론 학문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1576년 32세 되던 해 식년무과에 급제하여 함경도 변방의 동구비보 권관을 시작으로 훈련원 봉사, 발포 만호, 건원보 권관, 훈련원 참군, 사복시 주부, 조산 보만호, 선전관, 정읍현감, 등을 차례로 역임하다가 1591년 2월 서애 류성룡의 천거로 전라좌도 수군 절도사로 발탁 되었다. 

 

 

공은 전라 좌수영(여수)에 부임하자 일본의 침략을 예견하고 군사조련, 무기제조, 진지보수등에 힘썼으며 특히 세계최초의 철갑선인 거북선을 건조하여 이에 대비 하였다.

이듬해1592년 4월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애군 20여만명은 일사 천리로 북상하여 5월 2일에는 서울이 함락되는 등 파죽지세로 우리나라를 짖밟았다..

 

 

그러나 공은 5월초 1차 출동때 옥포, 합포 적진포에 40여척을 격파 승리한데 이어 5월 말부터 6월초에 이르는 2차 출동때 사천, 당포,,당항포, 율포에서 승리 하였고 7월에는 평양까지 진출한 육군 부대와 서해를 통해 연결 하려는 적 함대를 한산도에서 기습 대파하여 임진왜란 적 함대를 한산도에서 기습 대파하여 임진왜란의 전세를 뒤바뀌는 전기를 마련 하였으며 연이은 안골포 해전과 9월초 부산해전 등을 모두 승리로 이끌었다.

 

 

1593년 웅천 등지의 적 수멸군을 궤멸. 남해안의 적을 소탕하고 한산도로 진을 옮겨 본영을 삼았으며 최초의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다.

1594년 당항포, 장문포 등지에서 왜적을 소탕하였으며 전쟁이 소강상태에 들어가자 장기전에 대비하여 군사훈련, 군비확충, 피남민 보호, 산업장려 등에 힘썼다.

 

 

1597년 왜 간첩 요시라의 간계로 모함을 받아 서울로 압송되어 사형받게 되었으나 약포 정탁의 상소로 사면되어 권율장군의 막하로 백의종군 하였다. 그러나 정유재란때 원균이 참폐하자 삼도수군통제사에 재임되어 13척의 함선과 빈약한 병력을 거느리고 명량에서 133척의 적함과 대결, 31척을 부수는 대 전과를 거두었으며 이듬해 1598년 고금도로 진을 옮겼다.

묘소 어귀에 있는 이 비는 1998년 11월 충무공 순국 400주년을 맞아 충무궁 후손들이 세웠다. 충무공의 증직이 영의정으로 되어있는 이 비문은 강영훈 전 국무총리가 지었다.

 

그 후 적선 500여척이 철수하기위해 노령에 집결하자 명나라 제독 진인의 수군과 연합, 적군을 기습하여 접전중중인 12월 16일(음력 11월 19일)새벽 적탄에 맞아 54세를 일기로 일생을 마치었다.

 

 

공은 전 생애를 통해 일관된 애국심과, 충성심,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정의감, 지극한 효성심을 고루갖춘 인격자 이었고 특히 전략에 뛰어난 용장으로서 임진 왜란 중 싸움마다 승리했으며 적 수군의 기세를 꺽어 제해권을 장악하고 곡창지대 전라도를 방어함써 군량미 확보에 만전을 기하는 등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는데 가장 큰 공을 세웠다.

어제 신도비는 충무공의 공로를 치하하여 정조 대왕이 친히 비명을 지어 1794년(정조18)10월 4일에 세워진 비 로써 이충무공묘소아래에 있다.

우리 장하신 선조대왕이 나라를 일으킨 공로의 기초가 된 것은 오직 충무공 한사람의 큰 힘에 의한 것이다. 이제 내가 충무공에게 특별히 비명을 짓지 아니하고 누구의 비명을 쓴다 하랴(정조-어제신도비 서문 중에서)

 

글에도 능하여 난중일기와 시조등 뛰어난 작품을 남겼다. 선조 37년(1604년)덕풍 부원군에 추봉, 좌의정에 추증되고 선무공신 1등에 책훈 되었으며 정조 17년(1793)에는 영의정에 더해졌다.

 

 

묘소는 이곳 어라산에 위치하며 정조대왕의 어제 신도비가 세워졌다.

아산 현충사와 통영의 충열사, 여수 충민사 등에서 제향되고 있다.

 

 

 

이충무공의 묘소 입니다

 

 

문인석도 서 있습니다

보이는 묘비의 비문은 이봉상의 부탁은 ㄹ받은 이이명이 지었으며 영조때 세워져 충무공의 증직이 좌의정으로 되어 있다.

 

 

 

 

 

혼유석 앞에 좌우측으로 나즈막히 양쪽에 서있는 석물은 정확히 알수가 없었습니다

 

 

지대석에는 이런 문자가 새겨져 있기도 했습니다

 

 

울창한 소나무 숲은 조선 왕릉 못지 않습니다

 

 

충무공 묘소에서 내려다 봅니다

 

 

소나무숲이 잘 가꾸어진 산책로

 

 

전체 전경 입니다

 

 

 

 

 

 

 

 

 

 

 

이충무공의 신도비

신도비는 임금이나 2품 이상의 관직자의 무덤 앞 또는 길목 세워 죽은이의 사적을 기리는 비석 이다.

대게 동남쪽에 위치하며 남쪽을 향하여 세우는데 신도라는 말은 죽은자의 묘로 즉 신령의 길 이라는 뜻이다.

거북등위에 서있는 이충무공의 신도비는 공의 외손자 홍우기의 청으로 효종때 영의정 김육이 비문을 지었고 글씨는 오준이 썼다.

 

 

 

 

 

거북등위에 서있는 신도비

 

 

이봉상 신도비

1728년(영조4) 이인좌의 난으로 순절한 충무공의 5대손 충민공 이봉상의 신도비로 충무공 신도비 바로 옆에 있다.

충민공의 묘는 신도비 위쪽 능선에 자리잡고 있으며 비문은 이재가 지었다.

 

 

 

 

위토 모내기 행사가 성공리에 잘 이루어 지길 기원 합니다

이 충무공을 기리는 큰 행사이기에 성원을 기대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