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리/유네스코 세계유산 동구릉

2014. 5. 27. 14:41문화재를찾아서/한국사기행

-동구릉東九陵-

조선왕릉 중 최대 규모인 동구릉

동구릉의 구성을 먼저 알아 보겠습니다.

 

1.조선을 건국한 조선 제1대 태조의 건원릉 이다 태조는 고려의 무장 이었던 요즘 인기드라마 정도전의 무장으로 출연되고있는 바로 이성계의 능 입니다.

2.조선 제5대 문종과 현덕왕후의 현릉.

3.조선 제14대 선조와 원비 의인왕후, 계비인목왕후의 목릉.

4.조선 제16대 인조의 계비 장열왕후의 휘릉.

5.조선 졔18대 현종과 명성왕후의 숭릉.

6.조선 제20대 경종의 원비 단의왕후의 혜릉.

7.조선 제21대 영조와 계비 정순왕후의 원릉.

8.조선 제24대 현종과 원비 효현왕후, 계비 효정왕후의 경릉.

9.추존 문조와 신정왕후의 능

모두 9개의 능 이름으로 이루어진 조선조 왕릉을 모셔져 있어서 동구릉 이란 이름으로 역사되고 있습니다.

 

 

 

안내도와 세계유산 표지석 사적지 표지석 입니다 



 

 

조선왕릉 기념관 조선왕릉 분포도 그리고 9개의 능 재실입니다. 


 


 


관리 사무소 

보호수 

고목사이의 산책로 


 

 

-조선 제1대 태조의 건원릉建元陵-

고려의 무장 이었던 태조 이성계는 1392년 개경(지금의 개성)에서 왕위에 올라 새 왕조를 열었다. 도읍을 한양으로 옮기고 나라의 이름을 조선朝鮮으로 정하는 등 조선왕조의 기틀을 마련 하였다. 명나라와의 친선을 도모하기 위해 사대정책을 썻고 농본주의를 통해 농업을 장려했다. 그러나 아들들의 권력 다툼이 화를 불러 일으키자 정치의 뜻을 버리고 고향 영흥으로 돌아갔다. 말년에는 불도에 정진하다 1408년(태종8)5월 24일 창덕궁에서 74세의 나이로 승하했다.

 

건원릉의 홍살문

 

-동북면의 호랑이, 조선의 용이 되다.(태조)

조선태조 이성계(1335~1408)의 집안은 이성계의 고조인 이안사(목조)때부터 동붑면 지방에 정착하여 원나라의 지방관직을 수행 하면서 지역 토호로 성장했다. 원나라 말기에 이르러 점차 원의 세력이 약화되고. 고려에서도 공민왕의 반원개혁이 시작된다. 이성계의 아버지인 이자춘은 고려가 원나라에 빼앗긴 쌍성 총관부를 공격하는데 내은하여 고려의 예 영토를 수복하는데 큰 역할을 한다. 아버지 이자춘(1315~1361)의 뒤를 이어 이성계는 그 직위를 이어받으며 동북면의 실력자로 부상 하였다. 이성계는 무예에 출중했으며 특히 활솜씨는 가히 신궁으로 불릴만 했다. 실록에는 신기에 가까운 태조의 활솜씨를 소개하는 기사가 곳곳에서 발견 된다. 

건원릉의 정자각은 조선왕릉 조성제도에서 정자각의 표준이 된 건물 이다.

태종8년(1404)에 건원릉과 같이 건립 되었고, 그 후 몇차례의 중수가 있었지만

국조오례의, 길례 단묘도 설과 비교해 볼때 건립시의 기본적 틀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태조가 일찍이 친한 친구를 많이 모아 술을 준비하고 과녁에 활을 쏘는데. 배나무가 백 보(步)빡에 서 있고. 나무에는 열매 수십개가 서로 포개어 축 늘어져서 있었다. 여러 손님들이 태조에게 이를 쏘기를 청하므로. 한번쏘니 다 떨어졌다. 가져와서 손님을 접대하니. 여러 손님들이 탄복하면서 술잔을 들어 서로 하례 하였다고 한다.

건원능의 봉분에는 억새풀이 자라고 있다.

말년에 고향을 그리워하며 그곳에 묻히기 원했던 태조를 위해 태종이 태조의 고향

함경도 영흥의 흙과 억새를 가져다 건원릉 봉분에 심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는 사실 입니다.

 

고려말 이성계의 활약은 익히 알려져 있는 것처럼 화려하다. 홍건적이 개경을 함락 시키자 자신의 사병 2천 명으로 수도를 탈환, 제일먼저 입성 하였으며, 요동의나하추가 대군을 이끌고 쌍성 총관부 회복을 위해 공격하자, 지형지세와 전략, 그리고 탁월한 무공과 용병술로 적을 막아낸다.  또한 전국각지를 노략질 하던 왜구를 격퇴하고 황산대첩을 승리로 이끄는 등 이성계는 불패의 신화를 완성해 나간다. 원 나라의 세력에 기탁한 권문 세족에 의해 나라가 좌지우지되고 백성들의 삶이 유린되던 그때, 이성계는 차츰 백성으로부터 신망을 얻게 된다. 고려 조정에서도 군사 방변에 있어서 그의 도움을 무시할 수 없게 되었고, 점차 이성ㄱ{의 주변에는 새시대를 꿈꾸는 무리가 모여들게 된다.

 

 

 

드디어 이성계에게 용으로 승천할 기회가 찾아온다. 당시 대륙의 정세는 명나라가 원나라의 소유였던 철령 이북의 땅을 요구하며 고려에게 공세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이에 고려 조정은 맞서 싸우자는 주전론으로 입장이 기울었으나, 이성계는 4대 불가론을 내세우며 출병을 반대 한다.

첫째,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칠수 없다.

둘째, 여름철은 군사 소집이 불가하다.

세째, 수도를 비운사이 왜구가 침입 할 수 있다.

네째, 여름철이라 활의 아교가 녹아 쓸 수 없고. 병사들은 병든다.

 

 

하지만 끝내 출병은 이루어졌고 이성계는 압록강 하류의 위화도에서 회군(1388)을 단행하여 개경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우왕을 폐하고 창왕에 이어 공양왕을 세우고 1392년 7월 17일, 개경의 수창궁에서 마침내 왕위에 오른다. 동북면의 호랑이가 조선의용이 되는 순간 이었다.

 

-태조 건원릉 신도비 보물 제1803호-

구리 태조 건원릉 신도비는 1409년(태종9)에 세웠다. 태조 건원릉 신조비는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의 건국 과정을 비롯하여 생애와 업적등을 영원히 기리고자 태조의 일대기를 돌에새겨 세운 비이다. 이 신도비는 이수, 비신과 귀부가 양호하게 잘 보존되어 있어 조선초기 왕의 신도비는 물론 다른 신도비의 전형으로 평가 된다.

태조 건원릉 신도비는 당대의 신망 있는 문신이자 대학자였던 권근이 비문을 지었다. 또한 명문장가였던 변계량이 비음기를 지었으며, 명신이며 서예가인 정구가 전액을 쓰고 조선초기 명필인 성석린이 비문글씨를 썻다.

비록 비좌 부분이 새롭게 명나라의 석비 전통을 받아들여 세운 비로, 조선시대 석비의 기준작이 될 뿐 아니라 서예사를 비롯한 역사 및 문화사의 연구 자료가 되는 귀중한 문화재 이다.

 

 

 

-수릉綏陵-

추존 문조와 싱정왕후의 능

문조文祖(익종1809~1830)는 제23대 순조의 아들로 효면세자 시정 대리청정을 시작하여 인재를 널리 등용하고 백성을 위한 정치를 펴기위해 노력 했으나 22세에 요절 하였다. 1834년(순조34)아들 헌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익종으로 추대되고 고종때 문조로 추대 되었다.

신정왕후(1808~1890)는 풍은 부원군 조만영의 딸로 1819년(순조19)효명세자(뭄조)와 가례를 올리고 세자빈에 책봉 되었다. 1834년 부군인 효명세자가 익종으로 추존되자 왕대비가 되었다. 1863년 철종이 후사없이 승하하자 흥선대원군의 차남 고종을 왕위에 올린 후 수렴 청정 하였다. 83세까지 천수를 누리며 조선후기 정국을 주도 했다.

수릉의 홍살문 정자각 합장된 릉

관람 제 1코스 이기도 합니다. 



 

 

비각

 



 

 

-현릉顯陵-

조선 제5대 문종과 현덕왕후의 능

문종(1414~1452)은 제4대 세종의 맏아들로 8세에 세자가되어 29년 동안 세자 자리에 머물면서 학문을 익히고 정치 실무를 배원다. 1450년 세종이 승하하자 왕위에 올랐으나 건강악화로 재위 2년 만인 39세에 승하했다.

현덕왕후(1418~1441)는 화산부원군의 딸로 1431년(세종13)세자 궁녀로 들어가 세자(문종)의 후궁이 되었다. 1437년 세자빈인 순빈 봉씨가 폐위되자 세자빈에 올랐으며 1441년 단종을 낳고 산후병으로 세상을 떴다. 사후 문종이 즉위하면서 왕비로 추봉 되었다.

 현릉의 홍살문, 정자각, 문종릉과 현덕왕후릉 이다.

능은 좌측은 문종왕. 우측으로 현덕왕후능이다.


 


 

비각




 

-목릉穆陵-

조선 제 14대 선조와 원비 의인왕후, 계비 인목왕후의 능

선조(1552~1608),재위1567~1608)는 제11대 중종의 아들인 덕흥대원군의 셋째 아들로 1567년(명종22) 명종이 후사없이 왕위에 올랐다. 선조는 이황, 이이 등 인재를 등용하여 선정에 힘쓰는 한편 여러전적을 간행해 유학을 장려했다.그러나 심각한 당쟁으로 정치는 불안정했고 임진왜란으로 큰 피해를 입기도 했다.

의인왕후(1555~1600)는 반성부원군 박응순의 딸로1569년(선조2)왕비에 책봉되고 가례를 올렸으나 자녀를 두지 못했다.

인목왕후(1584~1632)는 연흥부원군 김제남의 딸로 1602년 왕비로 책봉되어 1606년에 선조의 유일한 적톤인 영창대군을 낳았으나 광해군의 손에 아들을 잃었다. 인목왕후는 서궁에 유폐되었다가 인조 반정으로 복위되어 대왕대비에 올랐다.

홍살문을 바라보는 3개의 능이 보인다

제일 죄측면에는 선조왕능. 중앙에는의인왕후릉. 맨 우측에 인목왕후릉이 보인다

이는 각각 이격 거리가 100여m정도씩 떨어져 있으며 이는 위치를 갈르듯 층이 생겨 나면서 현재는 물길이 흐르고 있기도 합니다. 



 

목릉의 정자각은 조선왕조 정자각중 유일한 다포형식의 건물 이다. 

비각 




 

의인왕후릉 

선조능의 문무인석 

 의인왕후능의 문무인석



 

 

서어나무 군락지 

층이 생기면서 생겨난 물길에서 노는 아이와 선생님 

서어나무 군락지 

이상형 소나무 



 

-휘릉徽陵-

조선 제 16대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의 능

장렬왕후(1624~1688)는 한원부원군 조창원의 딸로1638년(인조16)인조의 계비로 간택되어 가례를 올리고 왕비로 책봉 되었다. 1649년 인조가 승하하자 26세에 대비가 되었고 효종,현종,숙종 대까지 4대에 걸처 왕실의 어른으로 지냈으나 인조와의 사이에 자녀를 두지 못했다.

홍살문과 정자각 능침의 공간은 여느 왕릉과의 큰 차이없이 보여 진다. 


 


 

비각 



 


-원릉元陵-

조선 제 21대 영조와 계비 정순왕후의 능

영조(1694~1776. 재위1724~1776)는 제19대 숙종의 넷째 아들로 1724년 경종이 승하하자 왕위에 올랐다. 영종은 탕평책을 써서 붕당의 폐해를 없에기 위해 노력하고 백성들을 두루 살폈다.  조선 최장수 왕으로 보령이 83세에 이르며 재위기간은 52년이다.

정순왕후(1745~1805)는 오흥부원군 김한구의 딸로 영조의 원비 정성왕후가 승하하자 1759년(영조35) 15세 나이에 66세 영조의 계비로 책봉 되었다. 훗날 사도세자의 죽음에 빌미를 제공 하였으며 사도세자의 손자인 순조때에도 수렴청정을 하며 권력을 누렸다.

 영조의 원릉은 쌍릉으로 좌측의 영조와 우측의계비 정순왕후의 능 이다.



 

 

비각


 

 


원릉의 비는 세기로, 1776년 건립된 첫째비는"조선국영종대왕릉"이라 새겨져 있으며

이는 정조의 어필이다. 18900년 건립된 둘째비는 고종의 어필로"조선국영조대왕원릉"

이라 새겨져있고 마지막 하나는 정순왕후의 비로 "조선국 정순왕후부좌"라고 새겨져 있다.

-경릉景陵-

조선 제24대 헌종과 원비 효현왕후, 계비 효정왕후의 능

헌종(1827~1849, 재위1834~1849)은 요절한 문조(효명세자)의 아들로 1834년 할아버지 순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8세에 즉위해 대왕대비 순원왕후 김씨(순조의비)의 수렴청정을 받았다. 15세에 수렴 청정을 거두고[동문휘고], [열성지장], [동국사략], [삼조보감]등을 완성 하였으며, 각도에 제언을 수축하게 하는 등 치적을 남겼다.

효현왕후(1828~1843)는 영흥부원군 김조근의 딸로 1837년에 왕비로 책봉되었으나 6년만에 세상을 떠났다.

효정왕후(1831~1903)는 익풍부원군 홍재룡의 딸로 효현왕후의 뒤를이어 1844년 왕비에 책봉 되었다.

 

 경릉은 삼쌍릉으로 조성 되어 있습니다.

좌측의 헌종과 가운데 원비인효현왕후가 우측으로는 계비효정왕후의 능 입니다.


 


 

 비각

 



 

 

 


 

멀리서보는 삼쌍릉 

산책로 

소나무숲 

 



 

 

-혜릉惠陵-

조선 제20대 경종의 원비 단의왕후의 능

단의왕후(1686~1718)는 청원 부원군 심호의 딸로 1696년에 세자빈으로 책봉되었으나 경종이 즉위하기 2년전 세상을 떠났다. 1720년 경종이 즉위하자 왕비로 추봉 되었다.

 

 여느 왕릉과의 차이점은 보이질 않는다

 



 

 

비각 



 

 

-숭릉崇陵-

조선 제18대 현종과 명성왕후의 능

현종(1641~1674, 재위1659~1674)은 제17대 효종의 맏아들로 병자호란 후 봉림대군(효종)이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 있을때 조선 왕중 유일하게 타국 청나라에서 태어났다. 1659년 효종이 승하하자 19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현종은 군비를 강화하고 재정구조를 다시 정비하는 등 난을 겪으면서 흔들렸던 조선왕조의 질서를 확립하기 위해 노력했다.

명성왕후(1642~1683)는 영돈녕부사 청풍부원군 김우명의 딸로 1651년(효종2)세자빈으로 책봉되어 가례를 올렸으며 1659년 현종 즉위와 함께 왕비로 책봉 되었다.

 숭릉의 정자각은 조선왕릉의 정자각중 유일한 팔짝 지붕이다.

보물 제 1742호 이다


 


 

비각 

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