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5. 4. 20:59ㆍ문화재를찾아서/한국사기행
-세계유산 선릉, 정릉을 가다-
먼저 제11대 중종 정릉(中宗 靖陵)을 먼저 탐방을 하기로 합니다.
정릉은 중종대왕의 단릉 이다. 중종은 1488년 성종과 계비 정현왕후 사이에서 태어났다. 1494년 진성대군에 봉해졌다.. 1506년 9월 박원종등이 반정을 일으켜 조선 제 10대 왕인 연산군을 폐위시키고 성종의 둘째아들 진성대군을 조선 제11대 왕으로 추대 하였다. 재위 기간 중 조광조 등 새로운 학자를 등용하여 나라의 기틀을 확립 하고자 현량과의 설치하고 향약을 실시하여 향촌 자치를 시도 하였다.
그의 재위 기간 중 서원이 설립되기 시작 하였다. 주자도감(鑄字都監)을 설치하여 활자를 개량하여 많은 책을 펴냈다. 북방 야인의 침입을 대비하고. 삼포에서 왜인들이 남동을 부리자 이를 진압 한 뒤 비변사를 설치하여 국방체제를 정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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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실전경 |
재실내부전경 |
내부의 재실 |
왕비로는. 신수근의 딸인 원비 단경왕후(1487~1557)는 양주시 온릉에, 윤여필의 딸인 제일계비 장경왕후는(1491~1515)는 고양시 서삼릉 희릉에, 윤지임의 딸인 제2계비 문정왕후(1501~1565)는 서울시 노원구 태릉에 모셔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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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안내도 |
조선왕릉 기념관 |
세계유산 표지석 |
선릉 정릉 입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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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사꽃이 활짝 피어 있다 |
불은 복사꽃 전경 |
야생화 |
야생화 |
중종은 3비 9후궁에게서 9남 11녀를 두었다. 1544년 11월 14일 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다음날 창경궁에서 승하 하였다 재위 30년만이며 보령57세였다. 1545년 2월 현재의 고양시 희릉에서 장사 하였으나, 문정왕후에 의해서 1562년 9월 4일 이곳 선릉 동남쪽 언덕으로 옮겨졌다. 문정왕후 사후 문정왕후도 이곳에서 장사하려 하였으나 한강의 범람으로 홍살문까지 물이 들어와 이장론이 대두하여 문정왕후는 태릉에서 장사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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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릉의 일직선상으로 조성되어 있는 모습을 볼수 있었다. 홍살문 참도 어도 정자각 그 뒤로 능침 공간으로 조성 되어 있음을 알수 있다. |
비각
정릉은 단릉으로, 홍살문과 정자각 능침이 일직선상에 있다. 병풍석의 면석에는 그름문양속에 십이지신이, 지대석과 만석에는 연꽃문양이, 인석에는 국화문양과 모란 문양이 조각되어있고 상석 및 난간석이 있으며 문인석과 무인석은 장대하고 선각이 뚜렸하여 머리가 몸에 비하여 큰 편 이다.
중종의 신도비
-이제 제9대 성종 선릉을 보기로 합니다-
성릉은 동원 이강릉으로 서쪽 언덕에 조선제9대 왕인 성종대왕이, 동쪽 언덕에는 계비 정현왕후가 모셔져있고 홍살문과 정자각이 두릉의 남쪽 가운데 위치하고 있다. 성종은 1457년 7월 30일 경복궁에서 세조의 맡아들인 의경세자(덕종으로추존)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세조의 뒤를 이은 예종이 1469년 11월 28일 재위 14개월 만에 승하하자 정희대비(세조의비)의 명에 따라 13세에 경복궁 근정전에서 왕위에 올랐다. 재위 중 경국대전을 반포하여 조선의 법전 체재를 완성하고 조세제도로는 관수관급제를 실시하여 동국여지승람 등 많은 서적을 편찬 하였다. 국조오례의를 편찬하여 유교예법을 확립하고 창경궁을 창건 하였다. 밖으로 윤필상등을 보내 압록강, 두만강 건너의 야인을 물리쳐 태평성대를 이루었다.
왕비로는, 원비인 공혜왕후(1456~1474)는 후사없이 승하하여 파주 순릉에 모셔졌다.연산군의 모후인 윤씨(1455~1482)는 폐비가 되어 서삼릉의회묘에, 계비정현왕후(1462~1530)는 이곳 선릉의 동쪽 언덕에 모셔져 있다.
성종은 3비 9후궁에게서 16남 12녀를 두고 1494년 12월 24일 창덕궁에서 보령 38세에 승하하니 재위 기간은 25년 1개월 이다.
정현왕후는 윤호의 딸로 1462년 6월 25일 태어나, 1473년 6월 숙의가 되었고, 1480년 11월 8일 왕비가 되어 중종과 신숙공주를 낳았다.. 1530년 8월 22일 경복궁에서 승하하여 10월 29일 선릉에서 장사 되었다.
성종대왕릉은 병풍석의 면석에는 그름 문양속에 십이지신이, 지대석과 만석에는 연꽃문양, 인석에는 해바라기와 모란 문양이 조각되어 있고 상석 및 난간석이 있다. 정현왕후릉은 병풍석과 상석이 없고 난간석만 있으며 이곳 석물들은 국조오례에 의하여 장대 하면서도 조화가 잘 이루어져 균형미가 있다.
성종은 왕위에 오르기전 왕세자 교육을 받지 못했다 왕이된 후에야 비로소 제왕학 교육을 받을수 있었다. 늦었던 만큼 성종은 열심히 공부했다. 13세에 왕위에 올라 20세 친정을 하기까지 성종은 성종은 거의 매일 두세차례의 경연(임금에게 유교 경전을 강의하고 정책을 논의하던 자리)을 빠지지 않았다. 7년 여 동안 성종의 월평균 경연 일수는 25일이 넘었고, 아침과 낮에 열렸던 조강과 주강은 물론, 석강과 야대를 합하여 하루에 세차례, 네차례에 걸쳐 경연을 실시 하였다. 성종의 이같은 경연 강행군은 신하들과 할머니 정희왕후도 걱정할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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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자각을 비롯한 모든요소요소에 복원공사가 한창 진행 중 이었습니다 비각과 수복방등도 함께 보수공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
경국대전의 완성과 반포, 집현전의 후신인 홍문관의 설치, 사림파의 등용 등은 성종의 학문적 성과와 노력의 산물 이었다. 그렇다고 성종이 방에 틀어 앉아 글만 봤던 책상물림은 아니었다. 성종은 시를 좋아하고 시를 지어 올리게 하여 감상했고, 성종 스스로 어제시를 지어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이를 하사 하가도 했다. 성종실록 곳곳에서 시에대한 성종의 특별한 관십과 사랑을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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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인석 |
무인석 |
풍월정은 성종의 친형인 월산대군의 정자이며, 성종은 평생 월산대군에게 각별한 우애를 보였다. 압구정은 세조 대의 훈구 대신이자 성종을 왕위에 올리는데 큰 역할을 했던 장인 한명회의 정자로 한강변(지금의 압구정 한강변)에 있다.
효성이 지극했던 성종은 대왕대비 정희왕후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며 시를 지어 올렸다.
오늘 왕모의 잔치를 와서 여니
마음의 노래자(老萊子)의 장나보다 더 합니다.
축수하는 술잔에 취했으나 은혜어찌갚으리이까
아침저녁 장구히 어김없이 받들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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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현왕후의 능 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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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사면에서 본 정현왕후 릉 |
조선왕조의 상징 소나무 숲 |
성종대왕의 능 상석 |
현재까지 조선왕릉을 여행한바
파주의 장릉 보수공사로 인한 공사중 출입금지
고양시 장흥에 있는 온릉 여기는 잠정 출입이 금지 되어 있었으며
영월의 장릉을 여행하면 우리나라의 모든 조선왕릉은 모두 취재를 완료하게 됩니다
아직 포스팅 못한 동구릉, 정릉, 태릉, 강릉이 남아 있습니다
모쪼록 많은 블친님들의 성원이 큰 힘이 되었기에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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