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유네스코 세계유산 헌릉,인릉

2014. 4. 25. 21:40문화재를찾아서/한국사기행

-헌릉獻陵, 인릉仁陵-

어느새 여름이 다가온듯 시야에 보이는 나무들의 녹음은 짙어만 간다.

수은주가 올라가는 나무 사이로 걷노라니 어느새 이마에는 땀방울로 송글송글 맺히나니.

벌써인가 하고 싶구나. 이 여름의 문턱인가 하노라,

 

먼저 인릉으로 가 보겠습니다.

 

인릉은 조선 제 23대 순조와 순원왕후의 능 이다.

순조(1790`1834, 재위1800~1834)는 제22대 정조의 둘째 아들로, 11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여 증조 할아버지 영조의 제2계비인 대왕대비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였다. 1803년(순조3)친정을 시작해 암행어사 파견9민기요람)편찬. 국왕친위대부대 강화, 하급 친위관료 육성 등 국정개혁과 왕권강화를 위해 노력 하였다. 순원왕후(1789~1857)는 영안부원군 김조순의 딸로 1802년(순조2)왕비로 책봉 되었다. 순조와의 사이에는 효명세자와 공주셋을 두었으며. 1857년(철종8)8월 창덕궁 양심각에서 승하 하였다.

 

 

 

"이 아이가 타고난 운은 나에게 견줄 수 있는 정도가 아니다"(순조)

오색 무지개가 종묘 우물에 뻗어 있으며 신비로운 빛이 궁궐 숲을 둘러싸고 있으니. 이 어찌 하늘이 주신 기쁨이 아니겠는가. 원자(순조) 울음소리가 나자마자 어린이 늙은이 할것없이 거리로 뛰어나와 좋아하는 빛이라든지 춤추는 모양이 자기 집안의 경사라도 그렇게 까지는 하지 않을 정도이니. 이는 사람들이 주는 기쁨이 아니고 무엇 이겠는가(정조실록 14년 6월 18일)

정조 실록에 따르면 순조의 탄생순간은 더없이 화려하다. 그 만큼의 정조는 아들 순조를 아끼고 귀하게 여겼다. 아바지 사도세자의 비극을 기억하는 정조 이기에 그의 아들 사랑은 더욱 각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의 태종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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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안내판 

세계유산 비 

헌릉,인릉 사적비 



 

그러나 정조는 천수를 누리지 못하고 갑작스레 승하하고 만다. 어린 순조가 후사에 잇기를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지만 미처 여유부릴 틈도 없이 왕좌에 올라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그때 순조의 나이 11세. 한창 부모 품에서 후계자 수업을 받을 나이에 왕위에 올라 산하를 거느리고 백성을 돌봐야하는 막중한 책임을 떠안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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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부에서 보는 재실

재실 안채

 재실 바깥채

재실에 피어있는 꽃 



 


 비록 시작은 정순왕후의 수렴청정 받아야만 했던 어린 왕이었을 지라도 순조는 한 나라의 군주로서 덕목과 위엄을 잃지 않았다.

친정 이후에는 실무 관원들과 직접 만났고. 암행어사를 파견 하여 백성들이 원하는 바에 귀 기울였다. 또한 왕권 강화를 위한 노력도 잊지 않았다. 아버지 정조의 빛나는 업적을 잇기위해[대학유의][만기요람] 등 학문과 정사에 관한 다양한 서적을 편찬 하기도 했다.

 

인릉의 정자각 

인릉의 비각 



그러나 정치 현실은 순조의 노려과 뜻데로 흐르지 않았다. 스렴청정의 그늘을 오랫동안 그의 뒤를 따라 다녔고 두 왕비 집안의 권력 다툼은 국정의 어려움을 가속화했다. 세도 정치와 탐관오리가 활개를 치자 궁핍해진 백성들이 전국 각지에서 들고 일어났고. 거기에 천재지변까지 겹처 민생은 악화되기 시작했다. 순조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악재 속에서 백성들의 아픔을 보듬으려 노력했다. 

신도비 

신도비 



어린 나이에 즉위해 정권의 험한 물살에 휩쓸린 가엾은 임금이었을지라도 백성을 살피는 마음만큼은 어느 왕에 못지 않았다. 1826년(순조26) 봄, 굶주린 백성들을 보고 순조는 한탄을 한다. 집집마다 들어가 보면 텅 비어 있고 마을마다 나가보면 밥짓는 연기가 끊어졌다. 백성의 부모가 되어서 백성들로 하여금 충분히 먹고 배를 두드리는 즐거움을 누리게 하지는 못할지언정 흉년 들어 굶주려 죽는 이들조차 구제하지 못하니. 내가 쌀밥과 비단옷을 편하고 아름다움을 느끼 겠는가.

순조는 왕실 돗간을 열어 백성들을 구제하는 데 쓰이도록 했다. 또한 1811년(순조11) 홍경래의난을 진정시킨 뒤에도 가장 먼저 살핀것이 민생 이었다. 그의 몸은 왕좌에 있었지만 두 눈과 귀는 늘 백성을 향해 있었던 것이다. 

 인릉 주위의 배경들



 

 

인릉의 능침공간 

 능침에서 내려다본 정자각



 

-헌릉-

헌릉은 조선 제3대 태종과 원경왕후의 능 이다.

태종(1367~1422, 재위1400~1418)은 태조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로 태조를 도와 조선을 건국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왕위를 놓고 태조의 왕자 사이에서 벌어진 "1,2차 왕자의 난" 을 치르고 1400년 왕위에 올랐다. 왕위에 오른후 사병을 혁파하고. 육조직제를 통하여 왕권을 강화했으며. 1405년(태종5) 개경에서 한양으로 재천도 하였다. 또한 국방을 튼튼히 하였으며. 호패법을 실시하고 신문고와 의금부를 설치하는 등 조선왕조의 기틀을 확립 하였다. 1418년(태종18) 3남 충녕대군(세종)에게 왕위를 물려 주었다.

원경왕후(1365~1420)는 여흥 부원군 민제의 딸로. 1382년(고려 우왕8) 이방원(태종)과 혼인했고 1392년(태조10 정녕옹주에 책봉 되었다. 태종이 왕위에 오르는데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으며 1400년 태종이 왕위에 오르자 정비로 진봉 되었다. 양녕,효렬,충녕(세종) 성녕의 4대군과 4공주를 두었다.

 

 

"부디 나의 부득이한 정을 알아 다오"

천하의 태종도 어느덕 후사를 생각해야 할 나이에 이르렀다. 이제 자신의 시대를 마무리하고 새로운 왕에게 새 시대를 열어 주어야 하는 책임이 그 에게 주어졌다, 태종은 아들로 하여금 자신의 전철을 밟지 않게 하기 위함 이었다. 또 지속된 왕권 강화와 왕실 안정을 위해 장자에게 왕위를 물려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장자 양녕에게 세자로 책봉되고. 태종은 세자 교육에 온 정성을 기울이기 시작 했다.

 헌릉의 정자각 이며 가운데 보이는 비각은 여느곳 보다 훨씬 크다

이곳의 신도비는 조선왕릉 신도비는 이곳돠 건원릉에만 있기도 하다.



그러나 세자 양녕의 문제로 아비의 어깨를 더욱 무겁게 할 뿐 이었다. 양녕의 삐뚤어진 행실은 날이 갈수록 심해져만 갔다. 아들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속은 새카맣게 타 들어갔다. 10년 넘도록 세자와 후계자 수업에 공을 들였지만 모두 허사였다. 장성한 양녕은 조정의 일이나 글 공부는 아예 뜻을 두지 않았다.  한 시대를 쥐고 흔들었던 태종이라 할지라도 아들의 기행 앞에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던 모양이다. 세자 나이 열일곱이 되던 해. 태종실록 10년 11월 3일 기사 속에는 여느 응석받이 부모와 다르지 않은 태종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날은 세자가 몰래 기생 봉지련을 옥에 가두니. 세자가 근심 걱정으로 음식도 들지 않았다고 한다. 결국 태종은 세자가 병이 날까 두려워 봉지련을 풀어주고 비단까지 하사하게 된다. 아들 앞에서는 한없이 작아지는 평범한 아버지 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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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각 

신도비 

신도비 



 

그래도 태종은 세자에 대한 기대를 거두지 않았다. 때로는 엄히 꾸짖고 때로는 눈물로 호소하며 세자를 어르고 달랬다. 항상 곁에두고 감사하는 것도 소홀하지 않았다. 매 사\냥을 갈때도. 신하들이 마련한 연회에도 꼭 세자와 동행했다. 그러나 기대를 가지면 가질수록 번번히 실망만 안겨주는 양녕 이었다. 반면에 셋째아들 충녕(세종)의 총명함은 태종을 웃음짓게 했다.

능침에서 내려다본 정자각 비각  

인릉에서 헌릉으로 가는길 


 

 

마침내 태종은 특단을 내린다. 양녕을 세자에서 페하고 충녕을 세자로 삼은 것이다. 태종 재위 마지막 해의 일이다. 마지막 까지도 양녕에 대한 기대의 끈을 놓지 않았던 태종의 수심 얼굴만 그려 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