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유네스코 세계유산 태릉, 강릉

2014. 5. 17. 22:57문화재를찾아서/한국사기행

-태릉泰陵-

차가운 심술이 많았던 오월의 어느날 역사여행의 취미를 갖고있는 어깨 동무는 태릉, 강릉을 답사하는 시간을 만들었습니다.

 

조선 제 11대 중종의 제2계비 문정왕후의 능

문정왕후(1501~1565)는 파산 부원군 윤지임의 딸로 중종의 제1계비인 정경왕후가 1515년(중종10)인종을 낳은후 산후병으로 7일만에 승하하자. 1517년 왕비로 책봉 되었다. 중종과의 사이에 낳은 아들 명종이 12세에 왕위에 오르자 어린 명종을 대신하여 8년간 수렴청정하며 권력을 행사 하였다. 독실한 불교신자였던 문정왕후는 승려 보우를 앞세워 불교 중흥을 위해 노력했다. 1565년(명종20)4월 7일 창덕궁 소덕당에서 65세로 승하하였다. 

 

 

"오직 주상께서 학문에 전념하여 고명한 경지에 나아가기를....."

17세에 왕비가 되어 34세의 나이에 그토록 바라던 아들을 낳고. 그 아들을 기어코 완으로 만든 집념의 여인. 그리고 8년동안이나 어린 아들을 대신해 국정을 지휘하며 막강한 권력을 행사한 여인 문정왕후. 그러나 역사는 문정왕후를 긍정적으로 평가 하지 않는다. 

 

 

당시의 사관은 그녀의 행동을 명백한 월권 행위로 간주 한다"<서경>목서에 암닭이 새벽에 우는 것은 집안의 다함이다" 하였으니 이는 문정왕후 이르는 말이다. 라고 사관은 기록하고 있다.

 

 

문정왕후의 모친 성정의 가장 큰 피해자로 그의 아들 명종을 손꼽는다. 국왕이 된 아들에게 "너는 내가 아니면 어떻게 이 자리를 소유 할수 있었겠느냐" 며 호통을 치고 왕이 자신의 말을 듣지 않자 회초리까지 들기도 했다는 일화는 유명했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명종을 눈물로 왕위를 지킨 임금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문정왕후의 정치적 월권은 적어도 국왕의 권위 누르거나. 자신의 정치적 욕심만을 위한 것은 아닌 것으로 보안다. 수렴청정을 끝내며 문정왕후는 다음과 같은 망을 남긴다.

 

 

지금내가 흔매하여국사를 보살필 수 없으며 또한 흉년이 들어 백성이 흩어지고 있으니. 내가 섭정한지 9년동안에 한가지 일도 볼 만한 것이 없다. 나는 주야로 근심하고 염려하여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해 하면서도 지금까지 머뭇거리며 귀정하지 않는 까닭은. 오직 주상께서 학문에 전념하여 고명한 경지에 나아가기를 바라 서였다. 지금은 주상의 연령이 왕성하고 학문이 성취되어 큰 일을 맡길수 있는데. 내가 어찌 계속해서 정사에 간여하겠는가. 

 

 

명종은 친정 하기에 아직 이르다고 한사코 거절했으나 문정왕후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명종 역시 그런 의도를 알았기에 뜻을 거스르지는 않았다. 남성중심의 문정왕후의 면면은 지나치게 부정적으로 그러진 것은 아닌지. 부모의 빗나간 사랑마저 권력에 눈이 먼 여인의 정치적 야욕으로 확대하지는 않았는지 생각해 볼 대목이다.

 

 

문정왕후의 죽음을 슬퍼하며 사흘 동안 밥 한 술도 뜨지 못한 명종의 모습에서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어머니 문정왕후에 대한 두려움보다 깊은 애도가 느껴진다.

 

 

대신들이 아뢰기에 "청컨대 애써 죽음 드소서"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 망극한 가운데 어찌 감히 3일 안에 죽을 먹겠는가" 하였다. 대신들이 또 아뢰기를 "종사의 중함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데.더구나 왕후의 유언에 전하의 원기를 보양하는 것을 신들에게 명하셨으니. 전하께서 신들의 청을 힘써 따르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하니 임금은 겨우 따랐다고 한다. 

 

 

어진 이를 불러도 오지 않으니 한탄 스럽다.

1565년(명종20년) 4월 6일. 문정왕후가 세상을 떳다. 문정왕후의 승하는 이제 명종이 어머니의 그늘에서 벗어나 온전히 자신의 치세를 펼칠 수 있는 날이 온 것을 의미 했다. 어머니를 깊이 애도했던 명종 일지라도 마냥 슬픔에 젖어 있을 수 없었다. 거의 한달 동안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왕의 염려해 신하들이 임금의 업무를 줄이겠다고 청하자. 명종은 단호이 거절한다.

 

 

"내 비위가 잠시 좋지 못하였으나 원기는 편하다. 어찌 공사를 보고 살피는 것으로 심기가 번거롭게 되겠는가. 공사가 정체되지 않아야 백성의 억울함이 펴이고 국사가 다스려질 것이다. 모든 공사는 보고토록 하여라" 

 

 

국정 쇄신을 위한 명종의 노력이 시작됐다. 명종이 가장 중점을 두었던 일은 인재의 등용 이었다.

국가가 인재를 등용함은 가장 중요한 일이다. 수령될 인물은 자상한 사람으로 십분 가려서 주의하고 시종이나 감찰이 될 간원들은 더욱 별도로 택해 주의해야 한다. 또 외방 수령 중에 명망이 있어 쓸 만한 사람이나 문신 및 청현직을 역임했던 사람으로서 하자가 없는 자라면 아울러 청반에 주의하라.

 

 

사욕에 눈먼 척신과 탐관오리 틈에서 명종이 매료된 인물이 있었으니. 바로 퇴계 이황이다. 명종은 퇴계의 학문과 인품을 높이 보고 가까이 두고자 노력 하였다. 퇴계가 병을 이유로 관직에서 물러나 경상도 지방에서 은거할 때였다. 명종도 어지러운 세상을 벗어나 학문을 닦으려 한 이황의 의도를 모르는 바가 아니였다. 명종은 여러번 사람을 보내 이황의 마음을 돌리려 애를 썻다. 그래도 끝끝내 이황이 사양하자. 이번에는 다른 방법을 강구했다. 독서당에 문신들을 모아놓고 초현부지탄(어진이를 불러도 오지 않으니 한탄 스럽다) 이라는 제목으로 시를 짓게 한 것 이다.

 

 

이황을 중용 하려던 명종의 바람은 안타깝게도 이뤄지지 않았다. 게다가 문정왕후가 세상을 뜬 후 하루가 다르게 쇠약해진 몸은 더 이상 국정을 돌보기 어려운 지경에 으르렀다.

재위 기간 22년 중 문정왕후 사후 2년 동안의 업적만이 온전한 명종의 치적이라 할 수 있겠으나. 죽음을 각오하고 국왕을 보좌하려던 신하도. 건강한 몸도 갖고 있지 못한 명종은 안타깝게도 뚜렸한 업적을 남기지 못한 채 보령 34세로 승하하고 말았다.

 

 

 

 

 

 

 

 

 

 

 

 

 홍살문과 정자각 그 뒤로 능이 있습니다

 

 

 태릉의 정자각

 

 

 태릉의 주위의 전경

 

 

 

 

 

 

 필자가 방문한 시간에 능을 관리자와 함께 개방을 하고 있었습니다

 

 

 장명등 입니다

 

 

 문. 무인석 그리고 석마. 유난히도 다른 능보다 문.무인석이 크다

 

 

 

문정왕후 태릉의 석물들은 능에 비해 1.5배에서 2배 가량 커서 문정 왕후의 위세를 보여주는듯 하다

 

 

 

 강릉으로 이동을 위하여 태릉을 다시 한번 봅니다

 

 

 강릉으로 향하는 길목 입니다

산을 넘어 가야 하는 산책로가 있습니다

이 길의 이동 시간은 30~40분정도 송 된다고 합니다

 

 

 계속 오르막 산책로 입니다

 

 

 소나무와 흙길이 참좋습니다

이마에는 송글송글 땀이 흐르기 시작 합니다

 

 

 

 오르막 내리막 산책로를 걸어 강릉을 도착 했습니다

먼저 후면에서 먼저 보게 됩니다

 

-강릉康陵-

조선 제 13대 명종과 인순왕후의 능이다.

명종(1534~1567, 재위1545~1567)은 제11대 중종의 둘째 아들로 1545년에 인종이 승하하자 12세의 나이에 왕위올랐으나 20세까지 어머니 문정왕후의 수렴청정을 받았다. 1553년(명종8) 수렴청정을 거두고 친정을 하며 외척을 견제하고 고른 인재를 등용하기 위해 노력 했으나 국정은 혼란하였다. 1563년 외아들 순희세자를 잃고. 2년 후에 어머니 문정왕후마저 세상을 뜨자 병약했던 명종은 병을 얻어 1567년(명종22) 6월 28일 경복궁 양심당에서 승하하였다.

인순왕후(1532~1575)는 청릉 부원군 심강의 딸로 1543년(중종38)경원대군(명종)과 가례를 올리고 1545년(인종1) 명종이 즉위 하면서 왕비로 책봉 되었다.

 강릉의 금천교 홍살문 정자각 그 후면에 강릉 입니다

 

 

 홍살문과 정자각

 

 

 

 

 

 

 

 강릉 입니다

명종과 인순왕후 능

 

 

 

 태릉과 마찬가지 석물들이 크게 보여 집니다.

 

 

 내려 오면서 보았던 능이지만 다시 후면에서 다시 찰칵~~

 

 

강릉의 수목들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