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양주/유네스코 세계유산 광릉

2014. 4. 16. 12:04문화재를찾아서/한국사기행

-광릉(光陵)-

광릉은  조선 제7대 세조와 정희왕후의 능.

 

쉬엄쉬엄 걸으며 즐기며 역사공부하는 조선왕릉을 거닐다.

 

세조世祖(1417~1468, 재위 1455~1468)는 제4대 세종의 아들로 1453년(단종1) 계유정난으로 권력을 잡고 1455년 조카 단종이 상왕으로 물러나자 왕위에 올랐다. 세조는 병약한 문종과 어린 단종을 거치며 떨어졌던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왕과 육조(이,호,예,병,형,공조)를 직접 연결하여 육조 직계제를 부활시켰으며 호적. 호패제를 강화했다. 진관체제를 실시해 전국방위체제를 수립하고 중앙군을  5위로 개편했다. 1460년(세조14) 9월 8일 수강궁(엤 창경궁) 정침에서 승하 하셨다.

정희왕후 貞熹王后(1418~1483)는 판중추부사 파평부원군 윤번의 딸로 1428년(세종10) 세조와 가례를 올리고 1455년 세조가 즉위하자 왕비에 책봉 되었다. 장남 의경세자(덕종)가 20세에 요절한뒤 차남 예종이 19세에 즉위하였으나 예종마져 재위 14개월만에 세상을 떠너자 의경세자의 둘째 아들 자을산군(성종)을 왕위에 올리고 13세 성종을 대신하여 7년동안 수렴 청정 하였다.

 

 

 

 

조선왕릉 유일의 하마비가 남아 있다.

선왕선비를 모시는 제사를 주관하기 위해 친행을 한 왕조차도 이곳 하마비에서 부터는 말이나 가마에서 내려야 했다.

 

 

 

"악樂을 아는자는 우리나라에서 오로지 진평대군 뿐이니"

세조에대한 역사적 평가는 여전히 팽팽하다. 과영 세조는 조카 단종의 왕위를 빼앗고 죽여버린 냉혹한 야심이 아니었던가. 아니면 실추된 왕권을 강화하여 조선의 기반을 튼튼하게 햬던 부국강병의 군주 인가. 모두 다 세조의 모습이다. 다만 자신들이 보고싶은 세조의 모습에 더큰 무게를 두는 것일 뿐이다.

 

 

세조는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혹한으로만 몰아 세우는 것은 세조의 종합적인 이해 하는데 도움이 되지를 않는다. 카리스마 넘치는 세조의 이면에는 음악에 뛰어난 재능을 보이며 아버지 세종에게 극찬을 받았던 모습도 존재한다.

 

 

세조가 일찍이 가야금을 타니 세종이 감탄하여 이르기를. 진평대군(세조)의 기상으로 무슨 일인들 이루지 못하겠는가? 하고 칭찬을 했다고 한다. 세조가 또 일찍이 피리를 부니 자리에 있던 모든 종친들이 감탄하지 않는 자가 없었고  학이 날아와 뜰 가운데서 춤을 추니 금성대군 이유의 나이가 바야흐로 어렸는데도 이를보고 홀연히 일어나 학과 마주서서 춤을 추었다고 한다. 세종이 또 문종에게 이르기를 악을 아는자는 우리나라에서 오로지 진평대군 뿐이니. 이는 전후에도 있지 아니 할 것이다 라고 하였다.

 

 

세조는 조선시대 그 어느 왕보다 신하들에게 술 자리를 많이 베푼 왕 이었다. 실록은 곳곳에 세조의 술자리 베품(설작)을 기록하고 있다.신하와 함께 거나하게 취한 세조의 인간적인 모습도 확인할수 있다. 그러나 세조의 술자리는 공신들을 결속하기 위한 뚜렸한 정치적 목적을 둔 것이었으며 술자리 이상의 무절제를 본인 스스로 용납하지 않았다.

 

 

내가 본래색을 좋아하지 아니하여 술을 마시고 싶으면 너(예종)와 여러 장상(장군과 재상) 등과 더불어 술을 마시고 절대로 궁첩과 더불어 술을 마시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네가 보는 바이다"(세조실록 8년(1462)12월 4일

[홍살문]

 

 

실제로 세조는 1명의 후궁만을 두었으며 술자리에는 평생의 반려자이자 조강 지처였던 정희왕후와 함께했던 경우가 많았다. 세조는 술자리뿐만 아니라 국가와 왕실의 크고작은 행사에도 정희왕후를 동반 했던 가정적인 군주이기도 했다.

[정자각 이다] 

 

 

1464년(세조10) 1월 20일, 말년의 세조는 궁을 나서서 왕위에 오르기전에 살았던 예집을 찾는다. 그리고 그곳에서 생사를 갗이했던 조강지처 정희왕후와 함께 술자리를 하며 금의환향한 자신을 뿌듯해 했다고 한다.

 

 

임금이 중궁(정희왕후)과 더불어.....하성위 정현조 집에도 거등 하셨는데. 이곳은 잠룡 때의 구저 이다. 술상을 차리고 음악을 들으면서영의정 신숙주에게 이르기를. 부귀하여 고향에 돌아가지 아니하면 비단옷을 입고 밤길을 걷는 것과 같다 하였다.

그 술자리는 아마 정치적 동지이다 반려자였던 정희왕후를 위해 세조가 마련한 최고의 이밴트 였을 것이다.

 

 

비각입니다

 

 

 

능침을 올라가는 돌계단 주변의 전 나무숲 입니다 

 

 

능침에서 내려다 보는 정자각 주위들 입니다.

 

 

능침 공간 입니다  능침을 둘러싸고 있는 것을 남간석. 병풍석. 지대석 이라고 한다.

 

 

무인석과 문인석이 양쪽으로 서 있으며 그 뒤로 석마가 자리를 잡고 있다.

우측의 모습

 

 

좌측으로의 문.무인석과 석마

 

 

가운데 서있는 탑의 모습이 장명등 이다. 바로뒤의 넓은 돌이 바로 혼유석이며 이릉 받치고 있는 돌이 고석 이다.

능침을 원으로 둘러싸고 있는 담장이 곡장 이라고 한다. 높이 서있는 망주석 뒤로는 바로 석호와 석양 이라고 한다

회으로 길게 놓아진 돌은 위에서 아래로 3칸으로 나뉘어져 있다. 제일 위에서 부터 상계. 중계. 하계라고 한다.

 

 

 

무인석 이다.

 

 

문인석 이다.

 

 

석양과 석호다

 

 

 

 

망료위 이다

 

 

지금까지의 릉은 정희 왕후 릉 이다

다음의 릉은 바로 세조의능 전경 들 입니다

 

 

조선의 왕릉은 거의 유사하거나 아주 공통적임을 알수 있다.

 

 

 

 

 

 

 

 

 세조의 능침공간에서 정자각을 바라보는 전경.

 

 

 

 

 

 

 

이곳에 당초 수랏간이 있었으나 현재는 그 집터만 남아 있습니다~

 

 

 

 

 

이곳은 국립 수목원이 주위를 둘러 싸고 있었으며 그 수목원은 휴일은 입장 불가 더군요

그리고 예약제를 통한 입장만 가능 하더군요 

여기 쓸어진 고목들은 큰 바람에 쓰러진듯 고요히 누워 있다 그리고 뿌리주위ㅡ이 톱으로 썰어진 진풍경도 보여 지더군요 

 

 

 

 

조선왕른에 새로이 전 왕릉에 이렇게 역사 문화관을 새로이 짖고 역사의 설명을 보완 하고 있었습니다.

능침을 만드는 세부적인 설명의 자료도 포함 되어 있기도 합니다.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제된 조선왕릉

우리는 한가지를 알고 가야 할것이 있습니다.

세계문화 유산 이란? 한번 등제가 되면 영원히 그냥 남아 있는것은 아니라는것을........

계속적인 실사를 통한 유지 또는 삭제가 가능한 일이랍니다.

우리는 더욱 아끼고 환경적인 개선을 통한 계속적으로 유지가 되기를 희망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