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고려궁지

2014. 3. 5. 22:18문화재를찾아서/한국사기행

 파마

강화 고려궁지

고려궁지는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도 관청들을 많이 지었다고 한다.

 

우선 고려궁지의 변천사를 더듬어 보기로 합니다.

-연혁-

1232   고려수도 강화로 첩도

1234   고려 강화궁궐 건립

1270   개경으로 환도, 궁궐과 성곽이 파괴됨

1622   봉선정 건립(태조의 영정 봉안

1631   조선행궁 건립

1636~1637   병자호란(청나라가 조선을 침략하여 일어난 전쟁으로

                 일부 건물이 불에 탐)

1638   유수부 동헌 개축

1654   이방청 건립

1695   장녕전 건립(조선국왕의 영정 봉안)

1713   만녕전 건립(조선국왕의 영정 봉안)

1781~1782   외규장각 건립(왕립 도서관)

1783   이방청 중수

1866   병인양요(프랑스가 조선의 문호를 개방 시키고자 강화도를 침범

         한 사건으로 많은 건물이 불에 탐)

1964   고려궁지 사적 지정(제133호)

1977   강화 중요국방유적 복원 정화사업

2003   외규장각 복원

 

 

-고려시대-

고려시대에는 이곳이 고려궁궐이 있었던 곳이다.

고려가 몽골군의 침략을 피해 1232년 강화도로 천도한 이후

최우 는 2,000명의 군사를 동원하여 이곳에 왕궁을 건립 하였다.

규모는 작으나 궁궐과 관아의 명칭을 개경과 같게 하고 뒷산의

이름도 송악이라 하였다.

 

 

이후 대몽항쟁기 39년간 고려 왕궁으로 사용하다가 몽골과의 화친후 고려 왕이 

개성으로 환도하게 되자(1270) 몽골의 요구에 따라 궁궐과 성곽을 모두 파괴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이곳을 행궁, 유수부 건물과 함께 민가까지 들어 서면서

고려시대 궁궐의 모습은 사라졌다. 현재의 고려궁지는 고려시대 궁궐의

영역일부에 지나지 않은 것으로 본래는 동서남북으로 뻗어나간 대규모

공간 이었다.

 

 

-조선시대-

조선시대에는 고려궁궝터인 이곳에 여러 관청건물을 세웠다.

1622년 (광해군 14)에 봉선전(태조영정을 봉안)을 건립하였으나

병자호란 때 소실되었고, 1631년(인조 9)에는 행궁을 건립 하였으며

1638년(인조 16)에 유수부 동헌을 개수하여, 1654년(효종 5)에

유수부 이방청을 건립 하였다.

 

 

1695년(숙종 21)장녕전 1713년(숙종 39) 만년전이 차례로 세워져 조선 궁궐의

모습을 갖추었다.

1782년(정조 6)황실관련 서적을 보관할 목적으로 왕립도서관인 외규장각을 건립

하였으나 병인양요(1866)때 프랑스군이 강화도를 습격하여 외규장각 안에 보관

중이던 서적을 약탈해가고 건물은 불 태웠다.

 

 

1964년 고려 궁궐터에는 사적 제133호"고려궁지"로 지정되었고

1977년 복원 정비되어 현재는 유수부 동헌, 이방청, 강화동종과

2003년 복원한 외규장각이 있다. 

 

 

 

 

 

-외규장각-

조선 정조 때 왕실관련 서적을 보관할 목적으로 강화도에 설치한 도서관으로

왕립도서관인 규장각의 부속 도서관 역활을 하였다.

설치 이후 왕실이나 국가 주요 행사의 내용을 정리한 의궤를 비롯한 왕실 관계

 서적을 보관 하였으나 1866년(고종 3)병인 양요 때 프랑스군이 강화도를 습격

하면서 의궤를 포함한 서적등을 약탈 하였으며. 나머지는 불에 타 없어졌다.

 

 

대한민국 정부와 민간단체에서는 프랑스 정부에 계속해서 외규장각 도서의

환수를 요구해 왔으나 반환협상이 연기 되거나 프랑스 측에서 계속 협상을

지연시키는 등 소극적인 자세를 보이다. 2010년 11월 12일 G20정상회의에서

양국의 대통령 간의 외규장각 도서를 5년마다 계약을 갱신하는 임대형식으로

대여하기로 합의하여 145년 만에 우리나라로 돌아 왔다.

 

 

 

 

 

 

 

 

 

 

 

 

 

 

 

 

 

 

 

강화 동종각

 

 

 

-강화동종-

조선시대 강화성문의 여는 시간과 닫는 시간을 알리는데 사용 하였던 종으로 높이가 198cm

입 지름이 138cm 종 꼭대기는 용 무늬로 조각되었고 한국종의 특색인 음통이 없다.

종 중앙에는 두줄의 횡선을 둘러 상하 2등분 하였으며 어깨부분에는 꽃 무늬로 유곽대가 있고

그 안에는 9개의 연꽃이 새겨져있다. 횡선 아래로는 종 입구 바로 위에 꽃 무늬를 새긴 긴 넓은

띠가 있을뿐 다른 장식은 하지 않았으며, 만든 시기(숙종 37)를 알 수 있는 글이 남아있다.

종 중앙에는 띠로 장식하는 것은 고려시대와 다른조선시대의 특징이라 하겠다.

 

 

 

 

 

 

 

 

빼앗긴 규장각  우리의 것이나 현 프랑스가 주인이된 우리의문화

이를 찾지 못하고 결국에는 임대 형식으로 우리나라에 돌아 왔다.

참담한 생각을 버릴수 없다.

왜 우리의 것이 외국 프랑스에 있을까

바로 병인 양요때 도적을 당한 것이다.

우리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정부나 민간의 합심으로 계속적

으로 노력을 해야 할것으로 사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