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국방유적 광성보

2014. 2. 11. 08:42문화재를찾아서/성·산성·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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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당신들을 응원 합니다.

 

강화도의 고려시대. 조선시대 강화도를 지켜내기 위한 전적지가 강화도를 애워 싸고 있다.

이곳 광성보 지역은 경기도의 덕포진과 함께 양면 공격의 주무대 이기도 하다.

손돌목의 급 물살을 이용하였다는 전쟁의 기술 부터가 우리의 선조들은 전술적 운용이 대단한

전공의 승부수 였다는 사실도 알수 있는 곳이다.

영하강 강건너의 덕포진은 해안으로 늘어진 포대의 위력은 상상할수 있는 명장면 이기도 하다.

http://blog.daum.net/wonilcnc/516 덕포진 라이딩   다시보기

손돌목의 전설이 있으리만큼의 주요 요새 였으며 "양공작전" 대승 지역이었다.

 

여기 광성보는 이제 명실 상부한 전적지 로서 관광객이 붐비는 최적지 이다.

사적지가 많은곳 평안히 쉴수있는곳 두루 둘러볼수 있는 전적지이다.반경이 넓고 많은 역사의

배움을 함께 할수 있어서 더욱 신나는 유적지 이다.

 

 

광성보(廣城堡)

사적 제 227호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불은면 덕성리 833

조선 1658년(효종 9년)에 설치한 강화도 해안수비 진지중의 하나다.

1679년(숙종 5년)에 강화도의 국방시설을 확장할 때 화도돈대. 오두돈대

광성돈대를 함께 축조하여 이에 소속 시켰다.

신미양요 때(1871년) 미국 군대와 사투를 벌인 격전의 현장으로서 이 때

전사한 어재연 장군을 기리는 전적비와 350여 명의 영령들을 기리기 위한

신미순의총이 있다.

 

 

 

광성보를 두루 돌아볼수 있는 안내판 이다.

라인을 따라 한바퀴를 돌아보는 시간은 대게는 약 1시간 반에서 2시간 소요 예정을 하여야 한다,

 

 

광성돈대

광성돈대는 광성보에 소속된 3개 돈대중 하니로서 숙종 5년(1679년) 함경도. 황해도.

강원도의 승군 8,000여명과 어영군 4,300명이 40일만에 완공 하였다고 한다.

1977년 포좌 4개소와 포 3문 복원 설치 되었다. 대포는 총이포라고도 하며 사정거리

700m로서 포알은 화약의 폭팔하는 힘으로 날아가나 포알 자체는 폭팔하지 않아 위력은

약하다. 병자호란에도 사용하였다고 한다. 소포는 사정거리 300m로서 포알은 대포와 같다.

대포는 조준이 안되나 소포는 조준을 하수 있었다.

작은 것은 불랑기라 하며 프랑스군이 쓰던 것이라 한다.

 

 

 

전시된 포명은 대포. 소포. 블랑기등이다.

 

 

광성돈대는 상부 바닥이 석재로 잘 만들어져있다

돈대의 특성에 따라 작은 돌. 토사(흙). 잔듸 등으로 만들어져 있기도 하다.

 

 

 

자욱한 안개속의 소나무 터널속의 한쌍의 연인들

 

 

 

 

 

 

 

 

쌍충비(雙忠碑)

1871년 신미양요 때 광성보 전투에서 순절한 중군 어재연(1823~1871) 외 53인의 순절비다.

1기는(광성파수순절비로 비의 규모는 높이 168cm. 두께25cm의 양면비로 1873년에 건립한 것이다.

다른 1기는 어재연과 어재순(1826~1871)순절비인데  높이 177cm. 너비 58cm. 두께 26.5cm의

양면비로 역시 1873년에 겅립 되었다.

고종 때부터 제사를 지내 왔으며. 1970년 부터는 어재연의 후손들이 제사를 올려 충절의 유업을 추모하고있다.

 

 

 

 

 

신미순의총(辛未殉義塚)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불은면 덕성리

이곳은 조선 고종 8년(1871년) 신미양요 때 광성보 일대에서 미해군과 격전 하다가

 전사한 용사들들의 묘가 있는 곳이다. 당시 중군 어재연 장군과 아우 재순을 비롯한

군관. 사졸 53인의 전사자중. 어재연 형제는 고향인 충북 음성군 대소면 성본리에 안장

하고 남은 군졸 51인은 신원을 분별할수 없어 7기의 분묘에 합장하여 그 순절을 기리고

있는 것이다. 광성보 전투에서 조선군은 최후의 한명까지도 포로가 되기를 거부하고

비겁하게 물러서지 않았으니. 외침에 대항하여 나라를 지키려는 우리 민족의 살신호국

정신을 보여준 곳이다.

 

 

손돌목 돈대(孫乭목墩臺)

손돌목 돈대는 조선 숙종 5년(1679년)에 축조된 돈대로 월래 돈대 중앙에 3칸의 무기고가 있었고

포좌 3개가 있었다. 돈대 넓이는 778m2에 성곽 길이가 108m이다.

고종 8년(1871) 신미양요 때 미국 해군과 치열한 백병전이 벌어졌던 현장이다.

 

 

 

 

 

 

 

 

 

 

 

 

 

 

 

 

 

광성포대

소재지 : 인천 광역시 강화군 불은면 덕성리 산123

광성포대는 손돌목돈대 주변 3곳에 설치되어있으며 각각 9좌. 4좌. 3좌의 포좌를 갖추고

있었으며 이 중 가장 규모가 큰 중앙포대는 길이 80m. 포좌의 크기 약 6m정도로 추정되고

있다. 1875년 운양호 사건을 계기로 외세에 문호를 개항함에 따라 파괴 되었던 것을 2004년

발굴 조사를 실시 유적이 확인되어 복원 정비를 하였다. 

 

 

 

 

 

용두돈대(龍頭墩臺)

용드돈대는 강화해엽을 지키던 천연요새로서 손돌목돈대에 속해있는 외곽 초소겸 포대이다.

고종 8년(1871년) 포대가 설치되면서 정비된 곳으로 1977년 강화 전적지 정화보수사업을 하면서

용두돈대라고 부르게 되었다. 병인. 신미양요 때 치열한 포격전이 벌어졌던 현장이며 1977년

성벽을 복원 하면서 강화 전적지 정화 기념비를 세웠다.

 

 

 

 

 

 

 

 

 

 

 

이곳 손돌목 용두돈대에는 보시는바와같이 밀물과 썰물때의 급물살을 이용하는 전술도 있었다.

 

 

 

 

 

 

 

 

 

 

 

 

 

 

 

 

 

 

 

 

강화도를 지켜내기위한 요충지의 방어전투를

두루 돌아보는 시간 선조의 애국정신 나라지키는 마음

다시한번 상기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