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삼랑성 (江華 三郞城) (정족산성, 鼎足山城)

2018. 1. 29. 20:43문화재를찾아서/성·산성·돈대


강화 삼랑성 (江華 三郞城)

(정족산성, 鼎足山城)


사적 제130호

인천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 산41번지


강화도 남쪽 해발 222m의 정족산(鼎足山)에 위치한 산성으로, 정족산성으로도 불린다. 고려∼조선시대에 수도 개경과 한양의 외곽을 방어하는 가장 중요한 관방시설이었다. 흔히 “강도(江都)는 서울의 목구멍이고, 정족은 강도의 두뇌”라 칭해질 만큼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다.


정족산은 5개의 산봉우리로 이어져 있는데, 산성은 능선과 계곡을 아우른 포곡식으로 축조되었다. 둘레는 2.3㎞ 정도로, 성곽은 산정상부에서 남문쪽 해발 75m 정도의 능선까지 내려와 있다. 산의 지형을 따라 성벽을 쌓았기 때문에, 북쪽과 남쪽의 고도 차이가 큰 편이다.

이 산성은 단군의 세 아들, 곧 삼랑(三郞)이 쌓았다고 전한다. 그러나 처음 쌓은 시기에 대해서는 삼국시대, 통일신라시대, 고려시대 등이 각각 제시되었지만 명확하지는 않다. 성벽은 막돌로 쌓았는데, 성곽에는 동문, 서문, 북문 등 3곳의 대문과 함께 복원된 남문이 있고, 4곳의 치(雉)도 확인된다. 그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동문은 막돌로 문 기둥을 쌓고 그 위에 벽돌로 아치를 올린 모습이며, 서문도 아치식으로 되어 있다.

성 안에는 고려시대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되는 전등사(傳燈寺)가 있다. 절 주변에는 1259년(고종 46)에 궁궐을 지었다고 전하는 고려가궐(高麗假闕)터가 있는데, 1264년(원종 5)에 불사(佛事)가 설행되어 원종이 친히 행차하였다고 전한다. 그 뒤 1660년(현종 1)에 실록을 보관하였던 마니산사고가 정족산성 안으로 옮겨져 ‘정족산사고(鼎足山史庫)’라고 불렸는데, 이 때 왕실 족보를 보관하는 선원보각(璿源寶閣)도 함께 건립되었다.

조선시대에 강화도가 한양을 방어하는 외곽 기지로 중시되면서, 고려가궐터에는 정조 때 정족진(鼎足鎭)의 군창(軍倉)인 정족창(鼎足倉)이 설치되었다. 그 뒤 1866년(고종 3) 프랑스 군대가 강화도를 침략하였을 때, 이곳에서 두 나라 군사가 치열한 전투를 벌이기도 하였다. 남문 안에 자리한 양헌수승전비(梁憲洙勝戰碑)는 이 때의 승리를 기념하여 세운 것이다.


삼랑성의 돌들은 여타 돈대나 성곽들은 화강석으로 쌓아올렸지만 이곳 삼랑성은 대부분 막돌을 정교하게 쌓아올린 모습을 볼수 있다.



정족산 삼랑성은 잘 복원된 성곽길을 따라 걸을수 있다. 이 길을 걷노라면 왜세의 침입이 수없이 많았던 우리의 선조들의 나라를 위한 준엄한 애국정신을 함양 할 수 있는 학습의 효과도 증대 할 수 있지만, 강화의 조망권에도 상당한 매력을 느낄수 있는 최고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정족산을 두루두루 돌아봄과 정족산 정상에서 내려다 보이는 전등사의 전경에는 이루 말 할 수 없는 수양의 길도 이기도 하다.


전등사를 방문 하는 사람들의 발길은 대부분 동문을 통하여 도보로 전등사 및 삼랑성을 돌아보는 코스가 대다수 많은 모습을 보아왔다. 이번 삼랑성 탐방에는 남문을 통하여 성곽을 돌아 보기로 하였다. 남문을 통과하고 사적비를 확인을 할 수 있다.


외부에서도 성곽의 모습을 바라보노라니 갈객성관이 유난히도 밝게 가까이 보이기도 한다.

남문 바로 옆에서 좌우의 성곽바라보니 수많은 돌을 운반하는 과정 부터가 난관 이었겠지만 나라를 위한 국구의 일념으로 선조들의 피와 땀의 결실노 대승을 이끌어낸 전적지로 명실상부하게 역사의 준엄한 페이지로 남아 있다는 증거가 바로 삼랑성 일것이다.


남문을 통과하여 좌면 서쪽을 향하여 성곽을 따라 오르다 보면 울창한 소나무 숲길에서 또 한번의 깊은 마음으로 되돌아보는 전승지에서의 힐링을 맞볼수 있었다. 남문의 소나무숲, 남문 전경, 동문전경, 서쪽 방향의 성곽


돌 하나하나에 정교함과 튼튼함으로 치석을 쌓아 올렸으니 어찌 외인들이 처 들어 올수 있었겠는가,

다가오는 적들을 향해 화살을 쏘아 나뒹굴게 하였던 모습이 영화의 한장면으로 상상해 보기도 한다. 승리의 성벽은 오래가는 법이라 했거늘.....


남문에서 동문방향으로의 성곽

동문에서 북쪽면을 따라 복원한 삼랑성의 전경들,



성곽길을 따라 오르다 보면 하나의 "치"가 나온다.



"치"의 형태와 외부에서 보는 치의 형태를 보다 면밀하게 관찰 할 수 있다.



봉우리에서 보는 강화의 조망권, 건너 마니산 전경이 한눈에 들어 온다.



봉우리에서 내려다 보이는 전등사 전경

정상부로 향하는 성곽과 또 하나의 "치"가 나온다.



서문을 향하는 곳곳에의 치첩의 모습들

그리고 서문과 외부의 성벽 전경





강화 정족산성진지(江華 鼎族山城陣地)

시도기념물 제66호

  • 인천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 644(온수리, 전등사)
  • 정족산성짐은 정족산 사고를 수호할 목작으로 조선중기 이후 설치된 국방시설이다. 1907년 방화로 전체 소실되어 평탄지로 있던곳을 2008년 발굴조사하여 11개소의 건물지를 포함 대규모 유구가 발굴되었다. 1870년대 이후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 정적산성진 지도에 표현되어 있는 내사, 진사, 포량고 등의 건물지와 담장시설,문지 등을 대부분 확인 하였다. 발굴된 일부 건물지의 경우 정적산성진 설치 이전인 1784년(정조 8년)에 건립된 건물지로 파악된다.사진위쪽


    양헌수 승전비(梁憲洙 勝戰碑)

    186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을 물리친 양헌수 장군의 공적을 기리는 비로 앞면에는 "순무천총양공헌수승전비" 라고 새겨져 있다. 양헌수 장군은 헌종 14년(1848년)에 무과에 급제한 후 벼슬을 지내다가 1866년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군을 물리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다. 승전비에는 양헌수를 비롯한 367명이 프랑스 군대를 맞아 활약한 당시의 상황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전등사의 외부를 감싸고 있는 삼랑성은 강화에서의 최고의 승전을 맞보았던 최고 보루였다.

    전등사의 유물과 보물들이 유난히 많은곳이다. 우리의 유산은 전등사 뿐만 아니라 실제 수훈은 바로 삼랑성(정족산성)에 있었다는점 을 양지하시고 조금의 시간을 투자 하신다면 방문 하시는 여러분의 큰 힐링의 시간을 맞보실수 있다는것을 알려 드리는 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