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암행어사 이건창의 생가

2018. 1. 18. 19:22문화재를찾아서/인물한국사


이건창 생가(李建昌 生家 )


인천광역시 시도기념물 제30호

인천광역시 강화군 화도면 사기리 167-3


이건창(1852~1898)은 조선시대 문신이다 대문장가로 고종 3년(1866) 15세의 어린 나이로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고종 11년(1874) 서장관으로 발탁되었고 충청우도 암행어사, 해주 감찰사 등을 지내면서 관리들의 비행을 단속하고 백성들의 구휼에 힘썼다.

강직한 성격 탓에 세 번씩이나 유배되고 또 풀려났다.

저서로는 당의통략(黨議通略)이 있는데 이는 파당과 족친을 초월하여 공정한 입장에서 당쟁의 원인과 전개과정을 기술한 명저이다.

이 건물이 지어진 시기는 확실치 않지만 기둥이나 보 등의 치목수법(治木手法)으로 볼 때 1백여년이 된 것으로 판단되며, 외부 담장이 자연석 다을 쌓아올린 담장으로 둘러져 있으며,  자연석(自然石) 기단(基壇) 위에 주춧돌을 놓고 삼량(三樑) 가구로 몸 전체를 짠 전형적인 한옥(韓屋)의 구조로 되었다.

안채는 ㄱ자형이며 대청을 중심으로 안방과 건너방이 좌우에 있고, 안방 앞으로 부엌을 내는 등 경기도 지방의 일반적인 살림집 모습을 하고 있다. 현재 이 건물 바로 옆에는 조부(祖父) 이시원(李是遠)의 묘소가 있다.


이건창 생가의 출입구의 전경



이건창 문학비



우물이 있고 그 옆에는 향나무가 서식하고 있다.



대청에는 명미당 이라는 현판이 있다.



다른곳 내부는 볼수 없었으나 부엌은 전형적인 일반산림집 형식이다.



경기도 지방의 일반적인 산립 형태의 ㄱ 자집.



안체와 사랑채 우물 생가의 전체전경



생가옆 바로 옆에는 이시원 묘소가 있다.

이 묘소는 이건창의 조부 묘 이다.

이시원은(1790~1866)은 조선후기의 문신으로 자는 자직(子直). 호는 사기(沙磯) 이다.

고종3년(1866) 때 강화도가 함락되자 아우 지원과 함꼐 음독 자결하였으며, 후에 영의정으로 추증되고 춘정의 시호가 내려졌다.

저서로는 시문10권과 고금서(古今書) 1백여권이 있다.

이시원의 묘는 원래 길상면 길직리에 있던것을 1985년 정경부인 청송심씨와 함께 이곳에 합장 하였다.



또한 이건창 새가 바로 앞에는 수령 350년의 측백나무가 보호수로 지정을 받고 우뚝 서있다.

수고가 10m 나무둘레가 1.8m 이다.

명미당 앞을 바라보면서 서 있는 이 측백 나무는 이건창 생가와 길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는 천연기념물 탱자나무와 같은 시기에(1710년경) 심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강화학파를 이끌었던 영재 이건창 선생의 유년시절과 관직을 떠나 낙향하여 이 생가에서 생활하던 삶의 모습을 대변하는 두그루가 집 앞을 지키고 서있다.



한그루의 측백나무



둘레의 표본이 상당한 모습

이건창 선생의 유년시절 이 측백나무와 함께한 위풍이 함꼐 보여진다.

생가와 함께하는 조부의 묘소도 이곳으로 함께 하였으니

이건창 선생의 공덕이 더욱 빛을 발 할것으로 사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