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주/청백리의 표상. 방촌 황희선생 묘역

2015. 9. 19. 11:58문화재를찾아서/인물한국사

황희선생묘 (黃喜先生墓) 

 

경기도  기념물  제34호

조선 왕조를 통하여 가장 명망있는 재상으로 칭송되었던 방촌(방村) 황희(1363∼1452) 선생의 묘소이다.

고려 공민왕 1년(1389)에 문과에 급제한 후 성균관학록을 지냈으며 고려가 멸망하자 한 때 시골에 은거하였으나 조정의 요청과 동료들의 천거로 성균관학관으로 제수되었고 이후 여러 직책을 두루 맡았다.

그는 태종의 극진한 예우를 받으며 6조의 판서, 대사헌 등 요직을 거치면서 문물과 제도를 정비하여 조선 초기 국가 기반을 확립하는데 큰 업적을 남겼다. 태종 대의 관직생활을 통해 얻은 국정전반에 대한 깊이 있는 경험을 토대로, 세종 대에는 20여 년간 나라살림을 총괄하던 의정부에서 외교와 문물제도의 정비, 4군 6진의 개척, 문예진흥 등을 지휘하여 세종성세(世宗盛世)에 크게 공헌하였다.

묘역은 3단으로 넓게 조성되었으며 봉분의 규모 역시 크다. 봉분의 아랫부분은 화강암으로 둘레석을 둘렀으며 봉분 앞에는 제사를 지내기 위한 상석(床石)과 향로석 등의 석물이 있다. 좌우에는 동자상과 문인석이 한쌍씩 있고, 묘역 아래에는 그의 업적을 기린 사적비와 1945년에 세운 신도비(神道碑:왕이나 고관 등의 평생업적을 기리기 위해 무덤 근처 길가에 세운 비)가 있다. [출처:문화재청]

 

 

 

 

 

 

 

 

 

 

 

 

 

황희선생의 묘역은 3단으로 넓게 조성되어 있으며. 봉분규모가 매우 크다.

봉분의 구조는 다른 묘의 형태와달리 전면을 ㄷ 자 모양의 화강암 창대석을 이용해 호석을 쌓아 봉문과 연결시킨 특이한 구조이다.

봉분 앞에는 혼유석. 상석. 향로석이 있으며 그 앞에는 네개의 화창이 투각된 장명등이 위치하고 있다.

봉분 좌측에 묘비가 위치하며 그 아래로 동자상과 문인석이 한쌍씩 설치되어 있다.

선생의 묘역과 2백여미터 떨어진 맞은편 산자락에는 선생의 셋째 아들인 황수신(1407~1467)의 묘가 위치 하는데 아바지의 대를 이어 영의정에 오른 인물이다.

 

 

 

 

 

 

 

부조묘

묘역 왼편에 위치한 방촌선생의 부조묘는 선생의 신주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부조묘는 선생이 돌아가신 후 3년간 신주를 상청에 모신후 태우거나 묻지않고 선생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별도의 공간을 마련해 영원히 제사를 지내도록한 사당이다.

 

 

 

 

 

 

 

황희선생신도비각

 

 

신도비

묘역아래 원모재 앞 언덕에 황희선생 신도비가 세워져 있다.

1505년(연산11년)에 세워졌으며 신숙주가 글을 짓고 안침이 글씨를 썼다.

비문은 마모가 심해 판독이 불가능하며 원래의 신도비옆에 1945년에 다시세운 신도비가 있고 비각을 세워 보존하고 있다.

 

 

 

 

 

 

 

영정각

묘역 아래에 위치한 방촌 영정각은 황희선생의 영정을 모시고 제향을 지내는 건물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의 건물로 건물 내부에 황희선생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매년 음력 8월 8일 지역 유림과 후손들이 제향을 지내고 있다.

 

 

 

 

멀리 국도에서 바라본 황희선생 묘역 전경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