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조선 제10대 왕 연산군과 부인 신씨(愼氏)의 묘소

2018. 1. 24. 18:36문화재를찾아서/한국사기행

교동 연산군 유배지에 대한 폭군의 임금을 문화유산으로 봐도 되느냐는 질의가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가치적인 역사도 인정을 해야 하지만 그릇된 역사도 역사 입니다.

조선의 왕(임금) 이었으니까요, 현대사회도 더듬어 볼 역사가 있답니다. 대통령이 국민을 보실피지 못하고 일확천금의 부조리가 있었던 대통령도 대통령이요. 사형선고를 받고 사면 복권되어 대통령직을 수행하였고. 엄청난 게이트사건으로 지금도 감옥이라는 멍에에 걸려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분들은 역사속의 인물 이며 역대 대통령의 이름은 남을 것입니다.

성공한 지도자. 실패한 지도자 모두 역사속의 인물로 남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조선의 역사속에도 수많은 희노애락같은 역사속에 들어 있었던거랍니다.


연산군 묘 (燕山君墓)


사적 제362호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로17길 46 


묘 지정면적 1만4301㎡. 연산군은 실정(失政)이 극심하여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폐위되고

1506년(중종 1) 연산군으로 강봉(降封)되어 같 은해 9월 강화군 교동(喬桐)에 유배되었다.

그 해 11월 유배지에서 죽어 강화에 장사지냈다가 1512년 12월 폐비 신씨(愼氏)의 진언으로 그 이듬해 이 곳에 천장(遷葬 : 묘를 옮김)하였다.

거창군부인 신씨(居昌郡夫人愼氏)는 영의정 승선(承善)의 딸로 1488년(성종 19) 2월 세자빈으로 책봉되고,

1494년 왕비로 진봉(進封)되었다가 1506년 연산군과 함께 폐출되어 부인(夫人)으로 강봉되었으며 1537년에 죽었다.

분묘는 서편에 연산군, 동편에 부인의 묘가 쌍분(雙墳)으로 되어 있다.

묘역시설로는 대군(大君)의 예우(禮遇)로 장례하여 곡장(曲牆 : 무덤 뒤에 둘러싼 작은 담)·묘비(墓碑)·

혼유석(魂遊石)·장명등(長明燈)·향로석(香爐石)·문인석(文人石)·제실(祭室) 등이 갖추어져 있으나

병풍석(屛風石)·석마(石馬)·석양(石羊)·사초지(莎草地 : 오래 되거나 허무러진 곳에 떼를 입히어 잘 다듬은 곳)는 설치되지 않았다.

연산군묘비 전면에 ‘燕山君之墓(연산군지묘)’, 후면에 ‘正德八年二月二十日葬(정덕팔년이월이십일장)’,

부인 신씨의 묘비 전면에 ‘居昌愼氏之墓(거창신씨지묘)’, 후면에 앞구절은 파손되었고 뒷구절에 ‘六月二十六日葬(유월이십육일장)’이라 새겨져 있다.

[출처:한국민족대백과사전]


*신분에 따른 왕실 무덤의 분류는 능.원.묘 로 구분된다.

- 능 왕과 왕후의 무덤. 황제와 황후의 무덤

- 원 왕의 사친(왕의 후궁이나 종친)과 왕세자. 왕세자빈. 황태자. 황태자비의 무덤.

- 묘 폐위된 왕. 그 외 왕족과 일반인의 무덤.


연산군 묘

연산군도 폐위되어 묘로 일컷고 있다.


문인석 얼굴



사적비



문인석 석물



연산군 묘의 전체 전경



연산군 딸의 묘앞의 문인석



제일 위에서부터 연산군 묘와 거창 군부인 신씨의 묘가 있다.

연산군은 폐위되었으나 대군으로 예우를 받아 왕릉의 석물은 다 갖추어져 있다.

좌측통행로를 오르면서 본 모습



곡장을 뒤를돌아 우측으로 내려오면서 담은 사진



곡장 후면에서 본 연산군과 부인 신씨묘



중앙부에 의정궁주 조씨(태종의 후궁) 묘가 함께 있다.



연산군의 사위 구문경의 묘



연산군의 딸 묘



의정궁주와 연산군의 사위 딸의 묘를 위에서 본 전경


조선의 왕릉은 이제 온릉만 빼고는 모두 답사를 마친 것이다.

온릉은 아직도 미개방으로 보호되고 있다.

왕릉과 폐위된 왕의 묘는 달라도 너무 달르다.

이러한 우리의 역사에도 차별이 있었다는건 알고가야 맞는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