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9. 24. 09:42ㆍ문화재를찾아서/한국사기행
고려 21대 희종(熙宗, 재위 1204∼1237)의 무덤이다. 『고려사』에 의하면 ‘1237년(고종 24) 8월에 희종이 57세로 법천정사(法天精舍)에서 승하하자 낙진궁(樂眞宮)으로 옮겨졌으며, 10월에 덕정산(德政山) 남쪽 석릉에 장례를 지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희종은 1204년에 신종의 양위를 받아 즉위하였다. 최충헌이 권력을 남용하자 1211년 내시 왕준명(王濬明) 등과 함께 최충헌을 죽이려다가 실패하였다. 이로 인해 최충헌에 의해 폐위당하여 강화로 쫓겨났다가 이어 용유도로, 교동도로 옮겨졌다가 1219년 귀양에서 풀려나 개경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1227년 복위의 음모가 있다는 무고로 다시 강화로 쫓겨났다가 교동으로 옮겨졌고, 법천정사에서 죽었다. 묘역의 하단에는 정자각이 위치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흔적을 확인할 수 없으며, 2단에 1기의 석인상, 봉분 옆에 1기의 석인상이 남아있다. 특히 석릉은 강화에 있는 다른 왕릉과는 달리 봉분 뒤편에 곡장을 두른 것이 특징이다. 조선 현종 때 강화유수 조복양이 강화의 고려 왕릉을 확인하고 보수하였으며, 매년 능참봉을 파견하여 관리하였다고 한다. 1895년 이후 관리가 소홀해졌고 일제 강점기 때에 도굴되어 폐허가 되었던 것을 1974년 보수 정화하였다. 2002년에는 남한에 있는 고려왕릉 최초로 발굴하여 유구를 확인하였고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발굴 당시 청자편을 비롯하여 관장식용 금속류 등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출처:강화군]
강화 나들길 제3코스 능묘가는길 빼곡한 숲길. 그리고 숲 사이로 높이 보이는 가을하늘. 여러분 이런 기분 어떨까요?
역사를 돌아볼수 있는. 그리고 학습을 겸한 시대의 유산이라는 초점이 맞춰지고 있는 나들길 걸어보고 싶지 않으십니까?
한번쯤 이길을 통한 마음의 여유와 가을의 숲을 걸어 보시기를 바라는 마음 전합니다.
단. 혼자걷는 나들길 보다 여럿이 함께 걷는다면 많은 이야기꺼리가 쏟아져 나올것만 같습니다.
고려 희종의 능 전경
나들길에 표기된 산속의 이정표
본 이정표는 우측으로 가면 5km넘는 가능 가는길이 표기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여러분을 만났습니다. 어떤 청년은 혼자서 3코스 걷고 있더군요. 스템프도 찍고 체중조절을 위한 이만한 운동도 없다고 하더군요.
또 한분의 어른은 힘들지 않으세요. 어디서 왔느냐고. 되레 여쭙길 어른께서도 힘드실것 같습니다. 아네 그럼요 그래도 이길을 걷는 보람이 크시다더군요.
꼬불꼬불 걷는길은 으슥한 곳이면 조금은 머리가 쫑끗한곳도 있더군요.
걷는보람의 땀방울 이마에 식은땀을 흘리디 보면 어느새 석릉에 도착을 합니다.
복원의 흔적이 보이는 기단쌓기 등 여러모습이 나타난다.
고려의 왕릉은 조선시대와는 차이가 눈에 쉽게 볼수 있습니다.
석릉의 전체 전경이딥니다.
여기에는 5개의 기단이 보여 집니다.
석물이 세밀한 모습이 아니라. 투박한 모습을 하고 있네요.
고려희종석릉 이라는 묘비가 있습니다.
투박한 문인석으로 보여 집니다
지방 기념물 석비
희종 석릉에는 무덤 주위로 곡장이 잘 둘러져 있습니다
5개의 기단으로 잘 복원되어 있다.
조선의 언덕릉자를 쓰는 높은곳이다. 고려시대의 릉은 기단을 조성 하였다는 점이 특별해 보이기도 하다.
이정표가 있던 곳으로 원위치 하여 나들길 삼거리에서 이제 한참의 시간을 투자해야하는 길을 출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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