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경/후백제를 건국한 견훤 그가 태어난 곳은...

2015. 10. 7. 21:52문화재를찾아서/한국사기행

견훤 유적지 탐방

 

후백제(後百濟)의 시조(재위 900∼935). 황간견씨(黃澗甄氏)의 시조로 아자개(阿慈介)의 아들이다. 상주(尙州) 가은현(加恩縣) 출생(지금의 문경시 가은읍 갈전리 아차마을). 신라에 태어나 서남해(西南海)의 방위에 공을 세워 비장(裨將)이 되었다. 나라가 혼란한 틈을 타 892(진성여왕 6) 반기를 들고 여러 성을 공략한 다음 무진주(武珍州;광주)를 점령하여 독자적인 기반을 닦았다. 900(효공왕 4) 완산주(完山州;전주)에 입성, 스스로를 후백제왕이라 칭하고 관제를 정비하는 한편, 중국에도 사신을 보내어 국교를 맺으면서 궁예(弓裔)의 후고구려(後高句麗)와 자주 충돌하며 세력확장에 힘썼다. 그 뒤 왕건(王建)이 세운 고려와도 수시로 혈전을 벌여 군사적 우위를 유지하였다. 926년 신라의 수도 경주(慶州)를 함락하여 친려정책(親麗政策)을 취하던 경애왕(景哀王)을 죽인 다음, 김부(金傅)를 왕으로 삼고 철수하여 신라인의 원한을 샀다. 929년 고창(高敞)에서 왕건의 군사에게 패전한 후부터 차차 세력이 기울어져 유능한 신하들이 왕건에게 투항, 934년 웅진(熊津;공주) 이북의 30여 성()이 고려로 넘어갔다. 이듬해 왕위계승 문제로 맏아들 신검(神劍)에 의하여 금산사(金山寺)에 유폐되었다가 탈출, 왕건에게 투항하여 상보(尙父) 칭호와 양주(楊州)를 식읍(食邑)으로 받았다. 936년 왕건에게 신검 토벌을 요청하여 후백제를 멸망케 했으며 얼마 뒤에 황산사(黃山寺)에서 동창으로 죽었다 출처:문경문화관광

가은을 가다보면 이름모를 폐철도 지척에 세워진 민속건물 멀리서 사진으로 담았습니다.

 

 

견훤이 태어난 유적지 설명

 

 

금하정

 

 

금하정에대한 안내문

 

 

 

 

 

 

 

 

 

 

금하정으로 가는길

 

 

금하굴의 전경 아주 조그마한 바위굴 이더군요.

 

 

지금은 어떻게 이런굴에서.....

 

 

금하굴에 대한 안내문

 

 

 

 

 

 

금하정 툇마루 전경

 

 

 

 

 

금하굴 앞의 은행나무의 결실

 

 

은행나무

 

 

금하정 견훤의 집터 가는길에서....

 

 

안내문에서본 고인돌인듯....

 

 

 

 

 

마을들어가는 입구의 정자나무

 

 

마을입구에서 본 대추나무의 결실

 

견훤의 유적지를 탐방한 후기

견훤의 유적지라고 검색에 노출되어 있는바. 그 유적지를 탐방하는 순간 그야말로 놀라지 않을수 없었습니다.

유적지가 있는 마을은 참으로 환경적인 마을로 보인다.

가가호호 깨끗함과 마을 안길도 주민의 노력으로 가꾸어진 아름다움이 눈에 확연 하였습니다.

하지만 견훤의 유적지 안내에따라 집터를 찾아 나섰지만 결국 찾지를 못하였답니다.

우리역사의 인물 견훤 과연 문경 가은에서 태어났다는 증거가 있기에 설정되어 있지만. 정작 안내에 따른 집터는 흔적조차 찾기 어려웠답니다.

포기하고 내려와 주민께 여쭤 보았더니. 아마도 찾기 어려울거라더군요.

곡식들 사이에 펫말하나 꽃아둔게 전부라고 하더군요.

이유인즉 일부 지자체에서 사진으로 보듯이 소수적인 사항에만 진보적 이었다가 문화재는 중앙정부에서 관리하는 차원 이라는 조건에 묻혀 있다고 하였습니다.

차라리 견훤이 어디서 태어나고 유적지 라는 검색에서나 지워버리던지. 역사의 소중한 인물을 지워버리던지 해야하는것 아닌가. 작은 분을 삼키고 말았습니다.

소중한 문화유산은 역사의 가치를 충족하고 보존 및 복원 그 진실을 배울수 있는 문화공간 조성에 더큰 관심이 조성되기를 바라는 마음 실어 봅니다.

안내에 따른 흔적을 다시 공부 할 수 있는 시간이 빨리 진행 되기를 기원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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