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천/왕건과 궁예의 역사가 살아 숨쉬는 자인사

2014. 10. 19. 16:26문화재를찾아서/사찰·성지

산정호수,명성산에 위치한 자인사.

 

명성산 기슭에 자리잡은 자인사는 경내의 왜소한 대웅전에 비해 턱없이 큰 석불이 웃음을 자아내게 한다.

석불 외에도 관세음보살상과 몇 개의 석탑이 있다. 경내에서 솟아나는 샘물은 맛좋기로 소문나있다.
명성산은 포천군과 강원도 철원군에 걸쳐 있다. 험준한 암벽을 이룬 서쪽 산세가 특히 빼어나고 억새밭이 아름답기로도 유명하다.  

명성산, 즉 울음산이란 이름은 궁예가 자신의 부하였던 고려 태조 왕건에게 패한 후 이곳으로 쫓겨와 크게 울었다는 전설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국민관광지로 개발된 산정호수까지는 교통이 편리하고 숙박시설도 잘  구비되어 있기 때문에 이쪽에서 산행을 시작하는 것이 좋다.

 

 

 

고려를 세운 왕건과 후고구려를 세운 궁예의 팁을 먼저 알아 볼까요?

 

궁예 [弓裔, ?~918]

후고구려를 건국한 왕(재위 901~918). 성은 김. 몰락한 진골귀족의 후예로, 신라 제47대 헌안왕 또는 제48대 경문왕의 아들이라고도 한다. 아마도 정권다툼에서 희생되어 지방으로 몰려난 것으로 여겨진다. 어려서 세달사의 승려가 되어 선종(善宗)이라 불렸다.

 신라가 쇠약하여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891년(진성여왕 5) 죽주(안성)의 산적 기훤(箕萱)의 부하가 되었다가 892년에 북원 양길(梁吉)의 부하가 되었다. 그 후 양길의 부하를 거느리고 강원·경기·황해 일대를 공략하여 많은 군사를 모으는 데 성공하자, 군도(群盜)를 배경으로 세력기반을 굳혔다. 또한 평산의 호족이던 박지윤(朴遲胤)의 귀부와 해상무역에서 우위를 점하던 왕건가의 협조로 군사력과 경제력을 얻게 된다. 이러한 군사력과 경제력을 기반으로, 898년(효공왕 2) 양길을 타도하고 송악(개성)을 근거로 자립하여 고구려의 부흥을 표방하고, 다시 901년에 후고구려를 건국하여 스스로 왕이라 칭하였다.

 904년 국호를 마진(摩震)으로 개칭하고, 도읍을 철원으로 옮기고 연호를 무태(武泰)에서 성책(聖冊)으로 고쳤다. 911년에 국호를 태봉(泰封)으로 개칭하면서 연호도 수덕만세(水德萬歲)로 고쳤으며, 914년에 다시 연호를 정개(政開)라 개칭하였다. 궁예는 국사를 총리하는 광평성(廣評省)을 비롯하여 병부 등 10부와 9관 등의 관제를 정비하여 국가의 면모를 갖추었다. 또한 강원·경기·황해의 대부분과 평안·충청 일부를 점령하고, 왕건과 제휴하여 진도·나주를 점령하여 남서해의 해상권도 장악하였다.

 그러나 신라를 멸도라 일컫고, 투항한 신라인을 모조리 죽이는 등 전제군주로서 횡포가 심하였다. 자신의 지위를 합리화하기 위하여 미륵신앙을 이용하였는데, 자신은 미륵불, 두 아들은 청광보살·신광보살이라고 칭하였다. 915년에는 부인 강씨와 두 아들을 살해한 후, 반궁예 세력에 대한 정치적 숙청이 이루어졌으며, 백성을 괴롭히는 등 호탕방일한 생활을 하였다. 이와 같이 폭군으로 전락한 그는 부하인 신숭겸(申崇謙)·홍유(洪儒)·복지겸(卜智謙)·배현경(裵玄慶) 등이 왕건을 추대하자 도망가다 평강에서 백성에게 피살되었다.

 

 

 

태조 왕건 [王建, 877~943]

고려 제1대 왕(재위 918~943). 본관 개성, 자 약천(若天), 시호 신성(神聖). 금성태수 융(隆)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위숙왕후(추존) 한씨이다. 29명에 이르는 많은 후비를 두었는데 이는 혼인관계를 통해 호족세력을 통합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895년(진성여왕 9) 아버지를 따라 궁예의 휘하에 들어가 898년(효공왕 2) 정기대감(精騎大監)이 되고, 900년 광주·충주 등을 공취, 그 공으로 아찬의 위계를 받았다. 903년에는 수군을 이끌고 전라도 지방을 공략, 궁예의 영토를 확장하여 알찬에 승진되고 계속하여 전라도·경상도 지방에서 견훤의 군사를 격파하는 한편 정벌한 지방의 구휼에도 힘써 백성의 신망을 얻었으며, 913년 시중이 되었다.

 

918년 세력이 강대해짐에 따라 난폭한 행동을 자행하는 궁예가 민심을 잃자 홍유(洪儒)·배현경(裵玄慶) 등에 의해 왕으로 추대되어 즉위, 국호를 '고려'라 하고 연호를 천수(天授)라 정하였다. 이듬해 수도를 송악으로 옮기고 융화정책·북진정책·숭불정책을 건국이념으로 삼아 정책을 펴나갔다. 지방 호족들을 회유·무마하는 한편, 서경을 개척하고 여진을 공략했으며 불교를 호국신앙으로 삼아 각처에 절을 세웠다.

 

935년 투항해 온 신라 경순왕을 맞아 평화적으로 합병하고 이듬해에는 앞서 항복해 온 견훤과 함께 신검(神儉)의 후백제를 공격, 이를 멸망시켜 마침내 후삼국을 통일하였다. 이 해 《정계(政誡)》, 《계백료서(誡百寮書)》를 저술하여 정치의 귀감으로 삼게 하고 943년 후세의 왕들이 치국의 귀감으로 삼도록 훈요십조(訓要十條)를 유훈으로 남겼다. 서예에 뛰어났으며, 능은 개성의 현릉이다.

 

 

 

 

 

 

 

 

 

 

 

 

 

 

 

 

 

 

 

자인사 연혁

궁예왕이 서기 901년 송악에 도읍을 정했다가 5년 후 서기 905년, 지금의 철원으로 도읍을 옮기고 국호를 태봉 이라 칭 하면서 연호를 수덕만세로 개칭 하였다.

그후 궁예왕은 그의 휘하 부장 이었던 왕건(877~943)을 시켜. 후백제를 공격하게 했다. 그때 왕건은 산자수명한 이곳에서 산재를 지내고. 현몽을 받아 승전 했다고 전 한다.  한편 훗날 궁예왕이 완건의 군사에 밀리고 쫓겨 지금의 명성산성(약4~5km 전방에 산성터가 현존함)에 진을 치게 되었을 때 이 곳 명성산 자인사 터의 커다란 바위 위에다 재사상을 차리고 자주 기도를 올리던"터" 라 하여 "잿터"라 불렀다.

뒷산을 명성산 이라고 한것이나. 구만동과 용화동 이라는 고을 이름이나 한탄강이라는 강 이름이나 모두 이런 맥락에서 붙여진 이름인 것이다.

 

 

 

재를 올리고 기원하던 "터"라 하여 "잿터"요 궁예왕의 군사나 식솔들의 울음 소리가 그칠줄 몰랐다 하여 명성산(울음산)이요 용화세계라 하여 용화동 이며. 하염없이 철원쪽을 바라보면서 눔물흘리며 시름에 잠긴 궁예왕에게 충신들 "이제 그만 들어가십시오, 그만 하십시오, 했다 하여 "그만"이 "구만"으로 불러졌고 궁예왕이 강변에서 한탄했다하여 "한탄강"인 것이다.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고 고려태조에 즉위하자 이곳에 조그만 암자를 세우니 그의 시호를 따서 이름을 신성암 이라 칭하고 국태만안을 기원해 왔으나 300여년이 지난후 산불로 소실되자 충열왕 3년(1227)에 다시 중건하고 절 이름을 왕건의 자호를 따 약천암 이라 했다.

그 뒤 거란 침입과 몽고침햑, 6,25동란등 수많은 전란을 거치는 동안 정확한 문헌과 역사적 기록은 모두 소실되고. 오로지 민가의 구전으로 전하는 이야기와 절터만 남아 있어 안타까운 노릇이다.

 

 

 

 

 

 

 

 

 

 

 

 

 

 

 

1964년 5월 허물어진 축대와 옛 법당자리로 추정되는 곳에 주춧돌만 몇개 나뒹굴고 있는 것을 김해공 스님께서 안타깝게 여겨 이곳을 말끔히 다듬고 석고로된 18척의 미륵불 입상을 조성 하였다.

그후 13평의 조그만 법당을 세우고 자인사 라고 이름 하였다.  

 

 

 

 

 

 

 

자(慈) 란 미륵의 뜻으로 불가에서 자비를 말하며. 궁예왕이 미륵세계를 구현코자 함의 숭고한 정신을  받들고자 함이다.

인(仁)은 용서와 화해의 의미를 담고 있는 글자라 하여 영계 에서나마 궁예왕과 태조왕건의 맺힌 악연을 풀고 미륵세계를 구원 하소서 하는 기원의 의미로 붙여진 절 이름 이다.

1993년 정영도 스님이 국민관광지에 어울리도록 석고 미륵불이 서 계신곳에 극락보전을 다시짓고 1998년에 옛날 법당건물울 그대로 보존시킨 채. 그 자리에 미륵좌불을 새로 조송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