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국방유적 계룡돈대

2017. 12. 17. 18:36문화재를찾아서/성·산성·돈대


강화도는 예로부터 외세의 침입이 많았던 곳으로서.그 전적지를 지금도 호국 교육열에 동참하고 있는 산물이 되고 있다.

신미양요와 병인양요를 통한 침입을 물리치고 당시에 죽음으로 막아낸 선열들의 우국충정이 잘 나타나 있는 전장 이었다.

통계적으로 53개의 돈대를 구축하였던 기록이 현재도 발굴 보존하는 현재진행 이지만 많은 전적지가 발굴. 역사적 가치를 보존하는데

많은 공헌을 기대해 본다.


계룡돈대를 검색하여 길을 따르다 보면 황청리 부락이 끝나는 곳에서 내비는 도착을 안내한다.

그러나 도착후 당황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곳에는 목적물이 없다.

하지만 목적지를 잠시만 둘러보는 지혜를 발휘하면 바로 확인 할 수 있다.

도착지에서 정면 넓은 들판 즉 바닷가 방향으로 눈여겨 살펴 본다면 아래 사진처럼 외딴 섬처럼 멀리 보이는 소나무 숲이 우뚝 솟아있는 곳을

볼수 있다.


계룡돈대의 전경은 해안선을 방어하기 위한 모태였던것으로 금방 알수있는 곳이다.

바다가 바로 앞이고 교동도가 눈앞에 들어오는것을 보면 목적이 무었이었을까도 감지 할 수 있는 곳으로 판단 할 수 있다.

강화도는 모두 작은 해협으로 구성된 지리적이라 어느 한곳도 노칠수 없었던 방어 지역이라고도 할 수 있다.

선조들은 이 모든 지혜와 역량을 총 동원 했던 것에는 각별한 군사적 요새였슴을 잘 헤아리게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 계룡돈대의 역사와 축조연대 축조인물등을 알아 볼까요?



계룡돈대(鷄龍墩臺)


인천광역시 시도기념물 제22호

인천광역시 강화군 내가면 황청리 282


강화 53돈대의 하나로 1679년에 축조되었다, 지나온 세월이 338년 째가 되고 있다,

옛날에는 규모가 큰 군사시설을 진이라 하고 작은 것은 돈대라 하였는데, 바로 해안 요새라고도 할 수 있다,

군사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돈대를 설치해 적군의 침입을 감시하고 직접 싸우기도 했으므로 오늘날의 초소라고 할 수 있다.

현재 강화도에는 53개소의 돈대가 남아 있는데, 1679년(숙종 5)에 설치된 것이다.

계룡돈대는 경상도 군위(軍威)의 어영군사(御營軍士)들이 축조한 돈대로, 강화 53돈대 중 유일하게 축조연대가 표시되어 있다.

경상도 어영군사들이  강화도에까지 지원 이었을까는 문헌이 없다.

돈대축조에는 30m×20m의 직사각형 모양이며, 한 면은 석축 높이 2m 정도에 길이가 30m이고, 3면은 석축(石築)되어 해변을 향해 정면으로

외적을 볼 수 있다.

망월(望月)돈대와 함께 직접 영문(營門)에서 관할했다. 석축 하단에 ‘강희18년 군위어영 축조(康熙十八年軍威禦營築造)’라는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다.



계룡돈대의 특성은 원형으로 되어있는 돈대가 많으나 이곳은 사각형으로 축조되어 있다.



화강암으로 축조된 장방형의 돈대인데 북쪽만이 원형대로 보존되어 있을 뿐, 3면은 파손되어 토성만 남아 있던 돈대가

최근 문화재 복원사업의 일환으로 현재는 형태를 보존하여 잘 복구되어있다.



돈대는 적의 움직임을 살피거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서 영토내 접경지역이나 해안지역의 감시가 쉬운 곳에 마련한 초소로,

대개 높은 평지에 쌓아두는데 밖은 성곽으로 높게 하고, 안은 낮게 하여 포를 설치해두는 시설물이다.



정방향의 반대쪽의 전체모습



정방향에서 좌측면의 모습

기존 모습은 일부이면서 밝은 돌의 모습은 모두 복원된 전경이다.



하부를 지탱하는 지반은 모두 계단식으로 축조되어 있다



좌측면의 바위에는 나무의 이름은 알수 없지만 그 부리가 생성 자라면서 이큰 바위의 중심부를 잘라놓은것처럼 갈라져 있다.



돈대의 상부에는 성곽의 모양으로 축조 되어 있다



남아 있는 기록에 의해 조선 숙종 5년(1679)에 설치된 것임을 알 수 있는데, 이처럼 돈대의 제작년대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는 것은 보기드문 예이다.

장방형 화강암으로 길이 30m, 너비 20m, 석축높은 3~5m 규모로 쌓았는데, 동벽 석축 하단에 "강희 18년 4월일 경상도 군위어영(康熙十八年四月日慶尙道軍威禦營)"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어 강화지역 53개 돈대 중 유일하게 그 쌓은 연대를 알 수 있다



주위가 79보에 치첩(雉堞 : 성벽에서 돌출시켜서 쌓은 성벽, 그 위에 첩을 둘러침)이 33개이다.

화강암으로 축조된 장방형의 돈대로 북쪽만이 원형대로 보존되어 있을 뿐, 3면은 파손되어 토성만이 남아 있던 계룡돈대는 현재 잘 복원되었다. 

망월돈대(望月墩臺)와 더불어 영문(營門)의 관할하에 있었다.



성곽을 오를수 있도록 계단도 축조되어 있다.



성곽 바닥은 아래바닥과는 차이가 있으나 그위에서도 움직을을 원활하게 움직일수 있는 충분한 공간이 형성되어 있다.






내륙방향으로도 좁은면으로 축조되어 있다.



상부 성곽은 외부를 좀더 잘 보기위한 내부의 면적은 삼각형을 이루고 움직임을 많이 할 수 있는 형태로 축조되어 있다.



내부의 돈대 바다방향으로는 좁게 축조되어 있는 모습이다.



정방향에서 우측면은 월래의 모습을 많이 보존되어 있다.

하부는 계단식으로 보강 축조되어 있다.



돈대 앞의 대평원



평원농토의 반대방향은 바로 해안선 바다이다.

이 바다를 통하여 침입하는 적들을 공격하고 방어한 귀한 임무를 수행했던 돈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