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유성룡이 징비록을 집필한 옥연정사

2016. 8. 17. 06:30강물따라달리자/낙동강물길따라

유성룡이 징비록을 집필한 하회 옥연정사


중요민속자료 제88호. 유성룡(柳成龍)이 『징비록(懲毖錄)』(국보 제132호)을 집필한 곳으로 전하여오는 바, 그의 만년에 건립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회마을의 화천(花川) 북쪽 부용대(芙蓉臺) 동쪽 강가에 자리잡고 있어, 나룻배로 마을을 드나들게 되어 있다.

정사는 대문간채·살림채·사랑채·별당채로 구성되고, 이들은 각각 독립된 채로서 一자형 평면을 이루고 있다. 대문간채는 동남향하여 정면 6칸, 측면 1칸이고, 이곳에는 측간(厠間)과 광들이 자리잡고 있다. 대문간을 들어서면 안쪽 서쪽으로 동서향으로 면한 살림채가 정면 4칸, 측면 2칸의 크기로 자리잡고 있다.

북쪽에 온돌방 2칸을 두고 앞뒤로 반 칸 폭의 퇴를 두었는데, 동쪽은 벽체로 막아 방에서 쓰고, 서쪽은 개방하였다. 온돌방 옆 남쪽에는 부엌간을 두고, 그 옆으로 온돌방을 동서로 연이어 배치하고, 서쪽과 남쪽에 툇마루를 두었다. 살림채의 서쪽에는 별당채가 남향하여 하회마을을 굽어볼 수 있도록 자리잡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1칸반의 별당은 동쪽에 대청을, 서쪽에 2칸 크기의 온돌방을 두었다. 그리고 전면에 개방된 반 칸 폭의 툇마루를 두었는데, 유성룡은 주로 이곳에서 집필하였다고 한다. 별당채의 서남쪽에는 一자형 사랑채가 남향하여 있다.

정면 4칸, 측면 2칸 크기로 동쪽부터 방 1칸, 대청 2칸, 방 1칸을 두고, 앞뒤로 반 칸 폭의 퇴를 두었다. 이들의 구조는 모두 홑처마의 팔작집으로 방주(方柱)와 납도리로 결구되었고, 방에는 띠살창호를 달고, 대청 옆과 뒤쪽에는 판문을 달았다. 담장은 강가 전면과 안채 남측 벽 중간과 강가, 사랑채 서쪽에 남북으로 길게 쌓고 일각대문을 달았다.[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옥연 정사는 화산서원에 바로 갈수 있는 곳이지만 부용대를 거처 하산 하면서 옥연정사를 볼수도 있다.

소나무 숲속으로 보이는 옥연정사는 그야말로 경치또한 장관이었다.


부용대에서 내려오는 숲속의 옥연정사.



류성룡 선생이 학문을 위해 지은 정사, 옥연정사(玉淵精舍) *
하회 옥연정사는 서애 류성룡(1542~1607)이 평소 가깝게 지내던 탄홍(誕弘)의 도움을 받아 지은 것으로, 학문을 연구하고 제자를 양성하던 곳이다.



중요민속자료 제86호



원락재는 서애선생께서 이 방에 기거를 하시며 징비록을 서술한 곳이다. 친구의 내방을 기다린다는 뜻으로 원락재라 하였는데, 이 명칭은 논어 중 '이른바 먼 곳으로부터 벗이 찾아오니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有朋이 自遠方來하니 不亦樂乎(유붕, 자원방래, 불역락호)아라는 뜻에서 따온 것이다. 그리고 2칸 마루 애오헌은 도연명의 시에 '吾亦愛吾廬(오역애오려), 나 또한 내 오두막집을 사랑하노라' 한 시어에서 따온 것이다.



옥연정사의 내부 전경

서애 선생은 원지정사를 지은 뒤에 마을이 가까워서 번거롭고 그윽한 분위기를 누리지 못하여 강 건너 부용대 기슭에 터를 잡아 놓았으나 가세가 빈한하여 정사를 세우지 못하고 있었다. 이러던 것을 탄홍(誕弘) 스님이 그 뜻을 알고 건축을 맡고 재력을 부담하겠다고 자원하여 1576(선조9년)에 착공하여 10년만인 서애선생 45세 때인 1586(선조19년)에 겨우 완공하였다. 선생은 그 후 부용대 서쪽 기슭에 있는 형(겸암선생)의 정사인 겸암정사를 부용대 층길을 이용하여 오가며 형제 사이의 정을 나누었다. 그리고 1605년(선조38년) 낙동강 대홍수로 하회의 삼칸초옥을 잃고 이곳에 은거하며 임진난을 회고하여 징비록(국보 132호)을 서술하셨다.



옥연정사의 두 건물, 세심재와 원락재 *
세심재는 감록헌 마루를 가운데로 두고 좌우 방 1칸이 있으며 서애선생께서 서당으로 쓰신 곳이다. 서당채 주역계사편 중 의혹종사어사 이서기만일이(意或從事於斯 以庶幾萬一爾) ; 여기에 마음을 두어 만에 하나라도 이루기를 바란다는 뜻을 담고 있다. 그리고 마루 감록헌은 왕희지의 '우러러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아래론 푸른물 구비 바라보네'라는 시어에서 따온 것이다.



ㅇ유성룡의 시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