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경천대&무우정

2014. 8. 3. 11:54강물따라달리자/낙동강물길따라

[경천대&무우정]

낙동강의 신비를 간직한 천혜의 절경으로 자천대라 불렸으나 우담 채득기 선생이 이곳에 은거 하면서 부터 하늘을 떠 받는다는 뜻으로 "경천대"로 부르고 있다고 한다.

 

낙동강 최대 절경을 자랑하는 벼랑 경천대와 바로 옆 무우정(舞雩亭)있다. 사람들은 여기 벼랑 끝에 서서 하염없이 흐르는 강물을 마치 할 말을 잊은 듯이 물끄러미 내려다 보고있다. 앞서 전망대서는 웃음이나 감탄사라도 터졌지만, 여기서에서는 모두의 얼굴에 담겨지는 시선은 높은절벽 에서 내려다보는 공포심도 가득히 보이기도 한다. 특히 우담 채득기의 은거 생활의 모습도 상상해보는 소중한 시간 이기도 하다. 오늘의 날씨는 안개가 드리워진 모습에도 물줄기는  밀려오는 강바람은 몸을 휘감으며 지나간다. 무우정에서는 앞뒤로 둘러선 나무들 그늘을 그윽하게 즐긴다. 지붕 위에 피어난 노란 꽃이 색달랐는데, 거기서는 강물 흐름의 푸근함을 누릴 수 있었다.

경천대에는 임진왜란으로 명나라가 망한 자리에 새로 들어선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간 봉림대군을 모셨던 한 선비(우담 채득기)의 자취가 있다. 명나라 망한 까닭이 여럿 있지만, 임진왜란 탓이 적지 않음은 역사적 사실이다. 명나라 군대가 조선 땅에서 횡포를 퍽 부리기는 했지만, 조선 선비로서는 '명나라가 조선을 지켜주는 바람에 망하고 말았다'는 생각을 떨치기 어려웠을 테고, 그것이 여기 새겨져 있다.

 

[경천대 전경]

 

전망대에서 내려가는 데크 계단은 높고 가파른 계단으로 형성되어 있다.

이곳의 계단만 보더라도 산새의 높이를 알수 있기도 하다.

 

경천대를 바라보며 옮기는 발걸은은 가볍기만 하다.

 

소나무 한거루의 신성함이 돋보여지는 것에는 마음의 외로움을 달래 주기도 한다.

 

세월의 흐름에 증거를 확연히 볼수 있기도 합니다.

 

 

 

까마득한 높이의 공포 담력이 강조되는 풍경 입니다.

 

강 건너 들판에서는 뜨거운 태양아래 풍년을 기다리는 모습도 보여 집니다.

 

경천대에서 바리보는 포구의 전경.

 

 

누군가의 멋진 아이디어도 가미를 하고 있는 신비로움이 더해지는 광경 입니다.

 

 

 

 

[무우정]

병자호란때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청나라 심양으로볼모로 잡혀 갈 때 수행했던. 우담 채득기 선생이 관직을 마다하고 은거하며 학문을 닦던 곳이다.

 

우담 채득기(1604~`1646)선생이 1636년(인조14)병자호란을 예견하고 숭명의 의리를 지켜 은거하여 자연에 귀의하러 지은 정자 이다. 무우란 춤을 추며비를 빈다는 뜻이요 정자도 기우제터 우담위에 세워졌으나. 선생은 자연을 벗삼아 도를 즐긴디는 풍호영귀의 뜻을 취하여 그 이름을 삼았노라 밝히었다. 무우정은. 국난때 목숨바처 신하의 도리를 다하리라 맹세한 충신 연주지사[봉산별곡]의 산실이요. 청의 볼모가 된 소현세자. 봉림대군(효종)의 주치의로 특채된 재학지사로서 망국의 한을 품은 왕자들과 7년의 생사고락을 함께 한 충신 우담선생이 천추에ㅔ 고절을 세운 유서깊은 현장이다.

그러기에. 청음 김상용. 택당 이식. 계당 유주목 등이 기문을 지어 강산이 절사를 만나 그 무게를 더하였다. 기리었거니와 후대에는 경천대 무우정이 낙강시회의 중심이 되어 문향상주를 전국에 알리는 종무가 되기도 하였다. 무우정은 옛 것을 지켜 새것을 창출하려는 뜻있는 분들에 의하여 1748념에는 상주목사 이협이 중건하였고 1948념과 2005년의 보수를 거처 오늘에 이르렀으며. 먼 뒷날에도 상산낙수 거느리고 늘 여기 지켜 서 있을것을 소망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국민 관광지 속의 우리역사가 숨쉬고 있는 경천대와 무우정  가치와 보존에 큰 기대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