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음악계의 선구자 홍난파 생가를 가다

2014. 5. 13. 16:27문화재를찾아서/인물한국사

 -난파 홍영우 선생 생가 방문기-

거대도시 화성시에 있는 음악계의 선구자 홍난파 생가를 방문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난파 홍영우선생(1898~1941)은 이곳 화성군 남양면 활초리에서 태어 나시어 우리나라 여명기의 음악을 개척 하시기에 온갖 정성을 기울려 불후의 명작을 많이 남기신 음악계의 선구자 이십니다.

선생께서 지으신 "고향의 봄"의 가락이 온누리에 메아리치는 가운데 생전의 업적을 길이 추모하는 뜻에서 여기 태어나신 옛터에

길이 보존을 기원 합니다.

 

 홍난파 선생의 옛집을 복원한 전경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비석이 세워져 있습니다.

 

 

 네칸의 ㄱ자 형으로 복원 되어 있습니다.

 

 

 

 

 

 싸리문과 담장이 설치되어있어 전형적인 시골 이라는 표현이 살아나게 보여 집니다.

 

 

 

 

 

양반집으로 표현 하면 중간의 대청마루 위치에는 각종 홍난파의 업적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절구통 옛날에는 이것으로 쌀과 보리등을 찧어 활용했던 기억이 아련 합니다.

 

 1910년 황성 기독교 청년회(YMCA) 중학부에 입학하여 서양 음악을 처음 접했으며 일본과 미국으로 건너가 유학후 이화여자 전문학교 강사로 활동하기도 했다.

대표작으로는 봉선화, 성불사의 밤, 옛동산에 올라, 봄처녀, 금강에 살으리랏다, 고향의 봄 등이 있으며 저서로는 처녀혼, 비겁한자, 새벽종 등이 있다. 순수 예술 잡지 "삼광" 을 창간해 편집인겸 발행인으로 활동 하였고, 1937년 6월에 "수양동우회" 사건에 연루되어 대구 형무소에 옥고를 치르기도했다. 1941년 8월 지병인 늑막염이 악화되어 삶을 마감 하였다. 당초 생가는 멸시 하였으나 1986년 12월 목조초가 4칸의 ㄱ 자형으로 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사업비를 들여 고향의 봄 꽃동산을 조성개발 한다는 안내판 입니다.

 

 

현재 설치되어 있는 주차장과 화장실이설치 되어 있습니다.

 

 

 간이 급수대도 설치 되어 있구요

하지만 사용 한지가 넘 오래 된듯 합니다. 찾는이가 많지 않다는 결론입니다.

 

 

 

 

-지금부터 보이는 사진들은 모두 사업부지 예정 지구 입니다

이곳에 위의 안내판에 따라 고향의 봄 꽃동산이 조성 된다면 홍남파의 교육성에도 엄청난 효과가 기대 되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