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주/여진족을 정벌한 고려 윤관 장군 묘.

2014. 2. 27. 21:40문화재를찾아서/인물한국사

느낌표

 

파주 윤관 장군 묘 (波州尹瓘將軍墓)

용미리 석불입상(용암사) 에서 자운서원 방향으로 달리다 보면

우측으로넓디넓은 공원처럼 보여지는 곳이 있다.

바로 그 곳이 고려 여진족을 정벌항 윤관관군의 묘소가 있다.

시대의 장군으로 보아서는 장군의 무덤이 이렇게 크다는 생각이

어리둥절할 정도로 잘 꾸며져 있다.

조선의 왕릉에 버금가는 규모와 석조물들이 유사하게 설치되었

다는것에 놀랄 일이었다.

고려 마지막 비운의 공양왕릉을 보아서도 과히 짐작할만 하다.

 

국가사적 : 제323호

소재지 :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분수리 산 4-1

 

고려 중기의 문신인 유관(?~1111)의 무덤 이다.

그는 고려 문종(재위1046~1083) 떄 문과에 합격을 했다.

숙종 9년(1104)에 동북면행영병마도통(東北面行營兵馬都統)

이 되어 국경을 침입한 여진과 싸웠으나 패하였다.

그 후 여진정벌을 위해 별무반을 편성해 예종 2년(1107)에

정벌한후 9개의 성을 쌓았다.

 

윤관의 무덤은 어디에 있는지 명확히 알수 없었으나.

조선 영조 23년(1747년) 후손들이 지금의 자리임을 주장하여

영조 40년(1764)에 공인 되었다.

윤관 장군 묘 주변에는 후대에 세워진 비석과 석등이 있다.

위패는 예종의 사당에 함께 모셔졌고.

고려 태조와 충의공신을 모신 숭의전에서 함께 배향 한다.

 

 

 

이 느티나무는 (320년)는 고려때 여진을 평정한 윤관 장군의 묘역을 만든 기념으로 심었다.

윤관은 고려건국응 도운 삼한공신 윤신달의 고손이며 검교소부 소감을 지낸 윤집형의 아들

로 금파리에서 태어났다. 문종때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고 별무반을 창설하여 대원수로

정예 30만을 거느리고 여진족을 정벌한후 9성을 쌓아 두만강 이북 지역의 영토를 개척했다.

 

 

윤관장군 묘 의 안내판 이다.

 

 

 진국문 이다

 

 

충효관이 설치되어있다.

 

 

여충사 이다.

이곳은 문이 닫혀 있는 관계로 자세히 볼수가 없었다.

대문의 틈으로 랜즈를 삽입후 셔터를 눌르게 되었다.

 

 

여충사 측면부에서 다시 사진으로 담아 봤습니다. 

 

 

석물에 여충사라고 표식되어 있다.

문숙공 윤관 장군 묘역 이라고 쉬어져 있다.

 

 

 

 

 

추충좌리평융척지진국공신

수태보문하시중

문숙공윤관대원수사적비

 

 

고려문하시중영평백

문숙공윤관장군신도비 

 

 

 

 

 

윤관장군의 친필을 석물에 옮겨진것 같습니다

 

 

문숙공 윤관 장군의 묘이다. 

 

 

윤관장군의 묘소는 조선왕능 능침공간과 똑같은 모습을 하고 이었다.

단 정자각. 비각. 수복방등은 없지만 조선의 왕릉과 같다는것에 놀라움 이다.

고려 공양왕릉을 보더라도 알수 있듯이 이는 필시 조선에서 만들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무인석과 문인석이 보이고 있다.

둘레에 곡장 까지도 설치 되어있으며

석호와 석양도 있다.

가운대 장명등도 설치 되어있다.

 

 

 

 

 

문숙공 대원수가 쓴 일곱 살때의 칠언시(七言詩)

葉養天蟲防雪寒(엽양천충방설한)뽕잎은 누에 길러 추위를 막게 하고

枝爲强弓射犬웅(지위강궁사견웅)가지는 굳센 활로 쓰이어 오랑케를 쏠 수 있다.

名雖草木眞國寶(명수초목진국보)이름은 비록 초목이나 참 국보일세

莫剪莫折誡兒童(막전막절계아동)베거나 ㅓㄱ지 말라고 아이들에게 타일러야 되리

 

 

 

 

 

아이들을 데리고 방문하 가족 모두는 신나는듯 하지만 묘소 앞에 와서

두손모아 합장까지 하더군요~ 

 

 

 

 

 

교자총 이라고 합니다

 

 

전마총 이라고 합니다

 

 

 

 

 

 

문숙공 윤관장군을 잘 몰랐던 것에

이곳을 들러 배움이 많았다

여러분들께서도 잘 알지 못하셨다면

많은 도움이 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