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양/한국 최고의 원림 - 소쇄원 (瀟灑園)

2022. 9. 28. 11:07문화재를찾아서/한국사기행

역사문화 명소  담양 소쇄원에서....

24절기 중 백로가 지난 즈음 가랑비가 내리던날에, 담양 소쇄원 찾아 조선 중기의 자연+인공정원 절경을 눈으로 마음으로 한바구니 안아 담아 봅니다.

우산을 받처들고 저마다 소곤소곤 들리는 귓가의 고음을 이어가는 관람객들, 그들의 마음도 나와 닮은꼴 이었다고 보여집니다.

우선 양면의 왕 대나무들이 도열하여 반겨주는 빗소리와 함꼐 박수라도 치는듯 흔들리는 잎새들, 과히 입을 닫을수 없었어요, 빠른걸음으로 살짝히 높은 언덕길을 이동해봅니다.

이어 보여지는 정자 2채와 초가정 하나가 신선한 고풍을 자랑하듯 눈에 먼저 들어 오는군요

배롱나무의 꽃들과 뭇 사람들의 옛 선비들 모양새로 담소를 나누고들 있네요~

 

*아래 소쇄원의 역사적 변천을 대백과 사전을 통하여 알아볼까요!

소쇄원 역사적 변천

소쇄원(瀟灑園)은 양산보가 은사 조광조(趙光祖)가 남곤(南袞) 등의 훈구파에게 몰려 전라남도 화순 능주로 유배되자, 세상의 뜻을 버리고 낙향하여 향리인 지석마을에 숨어살면서 계곡을 중심으로 조영한 원림(園林)이다. 양산보(梁山甫)의 은둔생활(隱遁生活) 기간 중인 1520년부터 1557년 사이에 조성된 것이다.

소쇄원의 ‘소쇄’는 본래 공덕장(孔德璋)의 「북산이문(北山移文)」에 나오는 말로서 깨끗하고 시원함을 의미하고 있으며, 양산보는 이러한 명칭을 붙인 정원의 주인이라는 뜻에서 자신의 호를 소쇄옹(瀟灑翁)이라 하였다.

소쇄원의 조성사상을 보면 주자(朱子)가 중국(中國) 숭안현(崇安縣) 무이산(武夷山)계곡의 경승지인 무이구곡(武夷九曲)에 무이정사(武夷精舍)를 짓고 현실(現實)을 도피하여 은둔하는 행동양식이 깔려 있다.

당시의 건물은 임진왜란 때 소실되고 80년쯤 전에 중수하여 현재 2동이 남아 있다.

한편, 소쇄원에는 김인후(金麟厚)가 1548년(명종 3)에 지은 오언절구(五言絶句)의 48영(詠) 시(詩)가 남아 있다. 그리고 고경명(高敬命) 이 1574년 4월 20일부터 24일까지 광주목사(光州牧使) 임훈(林薰)과 함께 광주 무등산(無等山)을 유락(遊樂)하면서 4월 23일소쇄원에 들려서 보았던 계원(溪園)의 사실적 묘사가 「유서석록(遊瑞石錄)」에 남아 있다.

또 소쇄원의 배치를 목판(木板)으로 새긴 「소쇄원도(瀟灑園圖)」가 남아 있다. 이 목판은 가로가 35㎝, 세로가 25㎝로 양각으로 판각되었는데 1755년 4월 하순(숭정기원후 삼을해년청화 하완간(崇禎紀元後 三乙亥年淸和 下浣刊)에 제작했다는 판각기가 새겨있어 소쇄원의 원형(原形)을 상고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이 목판에는 위쪽에 김인후의 소쇄원 48제영(瀟灑園 48題詠)이 새겨있고 오른쪽 외곽에는 「창암촌 고암동 소쇄원 제월당 광풍각 오곡문 애양단 대봉대 옹정봉 황금정 유 우암선생필(창蒼巖村 鼓巖洞 瀟灑園 齊月堂 光風閣 五曲門 愛陽壇 待鳳臺 瓮井峰 黃金亭 有 尤菴先生筆)이라 새겨있다. 우암(尤菴)은 송시열(宋時烈)(1607∼1689)의 호이다. 이 소쇄원도(瀟灑園圖)에는 건물의 명칭 식물의 명칭 지당(池塘) 계류의 조담(槽潭)이나 바위 다리 물레방아 등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입구 담벽에는 원래 김인후의 소쇄원 48영(詠) 수제(手題)가 편액으로 걸려 있었음을 알 수 있다.[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소쇄원 입간판  누구나 한번씩은 읽어보시리라 생각해 봅니다.

 

매표를 하고 들어가는 입구의 왕대나무 숲

 

소쇄원 내부에는 기존 민가와 복합으로 있었지만 지금도 3가구의 민가가 거주를 하고 있다고 합니다.

민가의 담장위 기와의 울타리가 고즈넉 하군요~

 

이 초가정자는 "대봉대"라는 글귀가 내부에 잘 배치 되어 있어요

관람객의 쉼터로 고향의 정취를 만날수 있다고 해도 되것 같아요

흙길에 초가 정자에 작은연못에 건너에는 기와지붕의 고즈넉함이 이내 사람들을 차분함을 만들어 주기도 하더군요.

 

대봉대

사방 1칸의 초가지붕으로 되어 있는 현재의 초정 대봉대는 1985년경에 재건된 것이다.

소쇄원 입구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이 소정은 시원한 벽오동나무의 그늘에 앉아 봉황새(귀한 손님)를 기다리는 집이다. 「소쇄원48영」의 주요한 시점의 하나로 여기에 서면 소쇄원의 모든 정경이 한 눈에 들어온다. 대봉대는 귀한 손님을 맞기 위해 대를 쌓고 정자(소정)를 지은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즉 대봉대는 좋은 소식을 전해준다는 ‘봉황새를 기다리는 동대(桐臺)‘라는 뜻이 함축되어 있다. 그래서 그 곁에는 봉황새가 둥지를 틀고 산다는 벽오동나무와 열매를 먹이로 한다는 대나무를 심었다. 또한 입구 쪽으로는 상지와 하지가 있고 바람을 막기 위해 애양단이 바로 앞에 있는 것으로 미루어 상관성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소쇄원48영」 중 많은 구절이 적용되는 장소 가운데 한 곳이며, 제 37영 ’동대하음(桐臺夏陰)’에서 동대 주변의 분위기를 노래하였다. 이러한 주변의 상황으로 보아 ‘동대’란 대봉대를 가리킨다. 이 대봉대의 넓이는 4m×2.5m이다. 현재 대봉대의 초정 옆에 심어진 오동나무는 「소쇄원도」에 근거해서 15대손 양재영 씨가 최근에 심어 가꾸고 있다. 중국에는 봉황새가 모여 살았다는 봉황새와 봉황산이 많다 [자료출처: 소쇄원(www.soswaewon.co.kr)/]

신비로움이 더하다.

작은연못으로 유입되는 수로가 예사롭지 않네요

입간판의 사지으로도 볼수 있었던 모습이 여기에 이렇게 포진되어 있네요

이 수로는 무슨 나무를 통으로 이렇게 오랫동안 포진되어 있을까 궁금증이 더하기도 합니다.

변천된것일까? 아님 정말 조선의 역사가 그데로 보존되어 왔을까?

 

이끼긴 기와지붕의 담장

 

과히 이런 풍경에 감탄하지 않을소냐!

가던 발길을 멈추게 합니다

 

 

광풍각 후면에서 본 풍경

 

 

 

왕대나숲은 보는것만으로 장엄함이 눈여겨 볼만합니다.

 

민가쪽 후면에서 볼수 있는 탱자나무 열매 보는것만으로 입안이 침샘을 자극 시키네요

 

출입구있는 동백열매가...

 

입구에서 볼수 있는 은행나무위 열매가 이렇게 많이 열려있는 모습 입니다.

소쇄원의 4계절 탐방이 그때마다 정취가 달라지는 모습 계속 이어가고 싶은 마음이 깊어 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