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선원사지 (江華 仙源寺址)

2018. 2. 7. 10:39문화재를찾아서/사찰·성지

강화 선원사지 (江華 仙源寺址)


사적 제259호

인천 강화군 선원면 지산리 산133번지


선원사는 고려시대에 몽골의 침략을 받아 강화도로 도읍을 옮긴 후 1245년(고려 고종 32) 당시 최고 권력자였던 최우(崔瑀)가 자신의 원찰(願刹)이자 대몽항쟁의 정신적 지주로 삼고자 창건한 곳이다. 강화도 피난 당시 국찰(國刹)의 격을 갖던 사찰이었으며. 충렬왕 때에는 임시 궁궐로 사용하기도 했다. 특히 대장도감(大藏都監)을 설치하여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 목판을 조각, 봉안하였다는 점이 중요하다. 이때 조각된 팔만대장경 목판은 현재 합천 해인사에 봉안되어 있는데 1398년(조선 태조 7)한양의 지천사(支天寺)로 옮겼다가 1456년경(세조 2)해인사로 다시 옮긴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고려시대의 선원사는 순천 송광사와 함께 2대 선찰(禪刹)로 손꼽혔으나 1398년(조선 태조 7) 이후 아무런 기록이 없으며, 그 터는 잊혀져 흔적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1976년 동국대학교 강화도학술조사단이 지표조사를 통해 처음 발견하여, 몇 개의 주춧돌과 보상화무늬 전돌, 범자(梵字) 새긴 기와, 지붕에 얹었던 잡상 등을 확인하였다. 이후 선원면(仙源面) 도감마을, 도감산에 있는 절터이므로 학술적·역사적 가치와 지역 연원에 근거하여, 1977년 사적 제259호 강화선원사지(江華仙源寺址)로 지정되었으나 위치에 대한 논란이 있다.


1996년부터 2001년까지 4차례에 걸쳐 동국대학교박물관이 발굴조사 한 결과, 독립된 건물지 21개소와 부속 행랑지 7개소가 확인되었으며, 건물들은 북고남저의 지형 위에 동서로 긴 4개의 층단을 두고 빼곡히 들어서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중앙부 대형건물지(기단길이 38m)에는 삼존불을 지탱한 것으로 보이는 불단 유구가 확인되었고, 5개의 건물지에서 온돌시설과 배수시설 등이 확인되었으나 탑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발굴조사가 이루어진 지역은 건물지가 집중되어 있는 중심구역으로 남북길이 180m, 동서너비 180m정도이다. 출토유물은 자기류, 기와류, 소형 청동탄생불, 금동나한상, 탄화된 사경편 등이 주를 이루고 있다. 자기류(총 2,300여 점)는 12세기 후반∼14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청자편이 대부분(94%)이고, 기와류는 평기와가 가장 많다. 막새, 취두, 잡상 등이 출토되었는데, 이중 막새류는 연화문, 범자문, 귀목문이 대부분인데 ‘박씨(朴氏)·유씨(劉氏)’명(銘) 막새도 있다. 취두편은 모두 21개가 조사되었다.

출토 유물로 보면 절터와 관련된 유적으로 추정되나,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고려팔만대장경』을 판각했던 선원사(禪源寺) 터로 볼 수 있는 고고학적 자료가 확인되지 않아 논란이 되고 있다. 더구나 1931년 편찬된 『속수증보강도지(續修增補江都誌)』에 “선원면 선행리 충렬사 앞 인근 일대가 선원사의 유지”라 되어 있어, 향토사가들은 이를 근거로 현재 선원사지는 가궐터(假闕址)이며, 충렬사 전면 터가 선원사지라고 주장하고 있다. 문헌사학계에서도 현 위치가 문헌자료와 배치된다는 이유로, 선원면 선행리의 충렬사 부근이 선원사지이며, 대단히 많은 수량의 치미, 용두, 잡상이 출토된 현 선원사지는 사찰이라기보다 궁궐과 가까운 건물들이 들어서 있었던 곳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2013년 5월 한국문화재보호재단이 강화군 선원면 신정리에서 발견한 건물 터가 고려시대 가궐(假闕) 터로 추정되고 있어, 앞으로의 조사에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선원사지 입구의 고려팔만대장경 박물관 입간판










발굴 조사전 선원사지 터 1,2

선원사지 계단, 선원사지 전경






선원사 금당지 터 및 선원사지 터1,2,3,4


강화 선원사지는 1976년 동국대학교 강화도학술조사단이 강화도 일원에 대한 지표조사에서 처음 발견하였다. 발견 당시 이곳에서 몇 개의 주춧돌을 비롯하여 보상화무늬 전돌, 범자(梵字) 새긴 기와, 지붕에 얹었던 잡상들을 확인하고, 선원면(仙源面) 도감마을, 도감산에 있는 사지이므로 학술적·역사적으로 가치가 있어 지역의 연원을 기초하여 1977년에 사적 제259호 강화선원사지(江華仙源寺址)로 지정되었다.

동 유적에 대하여 1996년부터 4차례에 걸친 발굴조사(동국대학교박물관) 결과 건물터, 축대, 배수시설 유구와 연화문 기와, 금동탄생불, 청동나한상, 탄화된 금니사경, 묵서사경 등이 출토되어 절터와 관련된 유적으로 규명되고 있으나, 「조선왕조실록」에서 전하는 고려팔만대장경을 판각했던 선원사(禪源寺)터로 볼 수 있는 고고학적 자료가 확인되지 않아 이에 대하여는 장기적인 조사연구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발굴조사 및 출토유물

유규노출모습(서북-동남), 온돌시설, 출토유물(범자문 수막새), 출토유물(청동탄생불)


참고로 동 유적에 대한 4차에 걸친 발굴조사(’96년∼’01년) 결과 독립된 건물지 21개소와 부속 행랑지 7개소가 확인되었으며, 건물들은 북고남저의 지형 위에 동서로 긴 4개의 층단을 두고 빼곡히 들어서 있다. 중앙부 대형건물지(기단길이 38m)에는 삼존불을 지탱한 것으로 보이는 불단 유구가 확인되었으며, 5개의 건물지에서 온돌시설이, 그리고 배수시설 등이 확인되었으나 탑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발굴조사가 이루어진 지역은 건물지가 집중돼 있는 중심구역으로 남북길이 180m, 동서너비 180m정도이다.

출토유물은 자기류, 기와류, 소형 청동탄생불, 금동나한상, 탄화된 사경편 등이 주를 이루고 있으며, 자기류(총 2,300여점)의 대부분은 12세기 후반∼14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청자편이 대부분(94%)이고, 기와류는 평기와가 가장 많고, 막새, 취두, 잡상 등이 출토되었는데, 이중 막새류는 연화문, 범자문, 귀목문이 대부분이고 ‘박씨(朴氏)·유씨(劉氏)’명(銘) 막새도 있고, 취두편은 모두 21개가 조사되었다.

[사진글출처:문화재청]


대장경판 고려시대(복각) 현재 해인사 소장



대장경판 이운 추정 경로도



고려대장경의 이운



고려시대 팔만대장경 판각 당시 사용 되었던 칼의 흔적으로 보이는 돌



화엄경변상도 경판 현재 해인사 소장

대장경 교정별록 경판



대장경판 인쇄과정






대장경판 고려시대(복각) 현재 해인사 소장






팔만 대장경 천년기념






사적지 발꿀떄 나온 경전탄재 경전이란? 부처님 말씀을 적어 놓은책



옥동명문 햔대 동국대 소장



출토된 유물 고려시대 청자병



스리랑카 패엽경



패엽경

주로 남방 계통 인도 남부나 스리랑카 등에 팔리어 불경으로 야자수 잎에 새긴 경우를 말한다.

야자수 잎을 일정한 크기로 자른 후, 철필로 경문을 긁은 다음 새겨진 홈에 잉크를 붓고 닦아내고 건조한 다음 양쪽에 구멍을 내 끈으로 경전을 만들어 낸다.



고려대장 도감 판 아미타경(영인본)

 



고려대장 도감 판 금강경 인본



고려 팔만경



선원사지 발굴과 출토유물



팔만대장경 천년기념



상위 탁본



선원사 연표 고려시대, 조선시대, 현대에 이르기 까지



박물관 입구



박물관 입구



선원사에서 방송한 프로그램들



선원사 답지 않게 현제 큰법당으로만 활용되고 있다.


사역이 크게 네 구역으로 구분되어 층단식(層段式)으로 대지가 마련되어 있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남한지역에 현존하는 고려시대 사찰 터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

그러나 현재 까지도 명확한 역사의 근거가 미흡한 점도 많다.

하지만 학자들은 한치의 실수를 남발하지 않도록 현재도 연구 및 발굴조사에 근거한 자료를 토데로 연구 중 일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