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민족의 역사와 함께한 현존 최고의 사찰 전등사

2015. 9. 25. 21:47문화재를찾아서/사찰·성지

역사의 섬에 창건된 고찰 전등사

 

강화도는 섬 자체가 우리나라 역사의 축소판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선사 시대의 고인돌 유적부터 단군왕검의 얼이 담긴 마니산, 고려 때의 대몽항쟁과 팔만대장경 조성, 서양 세력과 처음으로 전투를 벌였던 ‘병인양요’에 이르기까지 강화도의 역사는 곧 한민족의 역사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지금도 강화도는 역사와 문화의 섬으로 그 중요성이 부각되고 있다.
강화도에는 전등사를 비롯해 유서 깊은 사찰도 많이 터 잡고 있다. 대표적으로는 호국불교 근본도량인 전등사와 전등사보다 300여 년 후에 세워진 보문사 및 정수사가 손꼽힌다.
전등사는 현존하는 한국 사찰 중 가장 오랜 역사를 가졌으며, 부처님의 가피로 나라를 지킨 호국불교 근본도량으로 역사와 권위를 간직한 사찰이다. < 세종실록지리지>에 기록된 바와 같이 삼랑성은 단군이 세 아들(三郞)을 시켜 쌓았던 고대의 토성이었고, 삼국시대에는 토성 자리에 석성을 쌓아올려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삼랑성 안에 자리 잡은 전등사는 세 발 달린 솥을 거꾸로 엎어놓은 모양을 가진 정족산(鼎足山)과 더불어 강화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문화 유적으로 유명하다.
전등사가 창건된 것은 서기 381년(고구려 소수림왕 11년)으로 전해지고 있다. 우리나라에 불교가 처음으로 전래된 것이 서기 372년이므로 지금은 그 소재를 알 수 없는 성문사, 이불란사(375년 창건)에 이어 전등사는 한국 불교 전래 초기에 세워진 이래,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도량임을 알 수 있다.
처음 전등사를 창건한 분은 진나라에서 건너온 아도 화상이었다. 당시 아도 화상은 강화도를 거쳐 신라 땅에 불교를 전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아도 화상이 강화도에 머물고 있을 때 지금의 전등사 자리에 절을 지었으니 그때의 이름은 ‘진종사(眞宗寺)’라 하였다. [출처:전등사]

 

 

진종사에서 전등사로

진종사가 다시 역사의 기록에 등장한 것은 고려 고종 46년 때인 1259년이었다. 이때 고종은 삼랑성 안에 가궐(假闕)을 지었다. 이보다 앞선 1232년, 고려 왕실에서는 몽골의 침략에 대응하기 위해 강화도로 임시 도읍을 정하고 궁궐을 지은 바 있다. 고려의 강화도 도읍은 1232년부터 1270년까지 이어진다. 그 기간 중 전등사 경내에 가궐을 지은 것은 풍수지리설과 더불어 임금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였다.
<고려사>에 따르면 “고종 46년(1259년), 임금이 삼랑성 안에 가궐을 짓도록 명했다.”는 사실과 함께 5년 뒤인 원종 5년(1264년), “임금이 대불정오성도량을 열어 4개월 동안 베풀었다.”는 기록이 있다. 여기서 대불정오성도량이라 함은 부처님의 가피로 나라의 온갖 재난을 물리치게 하는, 불교 행사를 일컫는다. 원종 임금이 진종사에서 이런 행사를 갖게 한 것은 당시 진종사의 사세(寺勢)가 크게 중흥되었음을 반증하고 있다.

고려 때 강화에서 조성된 팔만대장경 역시 부처님의 가피로 나라를 지키겠다는 호국불교 사상의 결정체였다. 고려 조정에서는 대장경을 조성하기 위해 1245년, 선원사를 창건했는데 그 무렵에도 오랜 역사를 가졌던 진종사가 대장경 조성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였을 것이라 추측되고 있다.
고려 왕실에서는 삼랑성 안에 가궐을 지은 후 진종사를 크게 중창시켰으며(1266년), 16년이 지난 1282년(충렬왕 8년)에는 왕비인 정화궁주가 진종사에 경전과 옥등을 시주한 것을 계기로 ‘전등사’라 사찰 명칭을 바꾸었다. 이때는 고려 왕실이 개경으로 환도한 뒤였고, 39년 동안 쓰였던 강화 궁궐터는 몽골군에 의해 폐허로 변하고 말았다. 그럼에도 삼랑성 안의 전등사는 꾸준하게 사세를 유지해나갔다. 그만큼 고려 왕실이 전등사에 깊은 관심을 가졌으며 정족산의 산세가 안온한 명당이라는 것을 뜻한다. 풍수가들 역시 ‘마니산이 할아버지산이라면 정족산은 할머니산으로, 신령스러운 기운이 있어 전란에도 피해를 입지 않는 복지(福地)’임을 강조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전등이란 ‘불법(佛法)의 등불을 전한다’는 뜻으로, 법맥을 받아 잇는 것을 상징하는 말이다. 당시 정화궁주는 인기(印奇) 스님으로 하여금 바다 건너 송나라에서 펴낸 대장경을 구해 전등사에 보관하게 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정화궁주의 옥등 설화보다는 송나라에서 전해진 대장경 때문에 전등사로 개칭되었다고 보는 것이 보다 근거가 있다. 그 대장경 속에는 <경덕전등록> 등의 불전이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전등사 대조루를 중건할 때의 모연문을 보면 ‘육조의 의발을 상수(相授)하는 뜻에서 전등사’로 개칭했다는 기록도 있다.
이처럼 전등사는 고려 왕실에서 각별한 관심을 가진 사찰이었던 만큼 그 후에도 충숙왕, 충혜왕, 충정왕 때에 연이어 중수(重修)되었다.

 

 

국난극복의 호국도량

조선말기로 접어들면서 전등사는 그 지형적 특성으로 인해 국난을 지키는 요충지 구실을 하기도 했다.
1866년, 프랑스 함대가 조선에 개항을 요구한다는 명목으로 강화도를 점령했다. 이에 맞서 조정에서는 순무영을 설치하고 양헌수 장군 등을 임명하여 프랑스 함대를 물리치게 했다.
이때 양헌수 장군은 휘하 병력을 이끌고 초지진을 건너 정족산성에서 적을 무찔렀다. 조선군을 얕잡아보던 프랑스 함대는 이 전투가 끝난 뒤 크게 전의를 상실하여 조선에서 물러갔다. 프랑스군은 양헌수 부대와 싸우기 직전만 해도 정족산성을 돌파하고 전등사에서 점심을 먹겠노라 공언한 바 있었다.
이 전투에서는 조선의 관군뿐만 아니라 경기·황해도 일대의 포수들, 전등사 사부대중들까지 가세하여 나라의 위기를 구하는 데 힘을 모았다. 조정에서는 전투의 승전을 기리기 위해 양헌수 장군 승전비와 비각을 정족산성 동문 내에 세웠다.
또한 지금도 전등사 대웅전 내부의 기둥과 벽화에는 여러 사람의 이름을 적은 낙서의 흔적이 남아있다. 병인양요 당시 부처님의 가피로 국난을 극복하려는 병사들의 염원이 그렇게 남게 된 것이다.
당시 국정의 실권을 쥐고 있던 대원군은 병인양요 후 전등사에 포량고를 건설하였고, 이듬해인 1872년에는 승군 50명과 총섭 1명을 두게 하여 전등사는 다시금 국난 극복의 호국 도량으로 자리매김되었다.
뿐만 아니라 전등사는 호국기도 도량으로 널리 알려져 창건 이래 나라의 역사를 움직였던 인사들이 꾸준하게 찾는 수도권 최고(最古)의 기도 도량으로 손꼽힌다. 현재 전등사에는 대웅보전, 약사전, 범종 등 보물급 유적을 비롯해 국가사적, 인천시 지정 유형문화재 등 무수한 문화 유적을 간직하고 있다.

 

 

조선 왕실과 전등사

전등사는 조선의 숭유억불 정책에도 불구하고 향화(香華)가 그치지 않았던 가람이다.
하지만 여느 고찰과 마찬가지로 전등사도 몇 차례의 화마를 겪었다. 조선 광해군 때인 1614년에도 화재로 인해 건물이 모두 소실되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지경 스님을 중심으로 한 대중이 재건을 시작해 1621년 2월에는 전등사의 옛 모습을 되찾았다. 지금까지 건물의 건축적인 가치는 물론 ‘나부상’으로 더욱 유명한 전등사 대웅전(보물 178호)도 이때 중건되었다.
숙종 때인 1678년, 조선왕조실록을 전등사에 보관하기 시작하면서 전등사는 왕실종찰로서 더욱 성장했다.
본래 왕실에서는 실록을 4부씩 만들어 궁궐 내의 춘추관과 충주, 성

주, 전주 등 네 군데의 사고(史庫)에 보관하도록 했다. 하지만 임진왜란 때 모두 소실되고 전주 사고만 무사했다. 이때 전주 사고본이 보존된 것만 해도 우리 역사에서 천만다행한 일이었다. 조정에서는 임진왜란 후 전주 사고본을 4부씩 옮겨 적게 하여 전주 사고본은 강화도 전등사로 옮겼고, 다른 실록은 봉화군 태백산, 영변 묘향산, 평창 오대산에 각각 보관하게 했다.
1707년, 강화 유수였던 황흠은 사각(史閣)을 고쳐 짓고, 다시 별관을 지어 취향당이라 이름하였다. 그때부터 정족산 사각은 실록은 물론 왕실의 문서까지 보관하는 보사권봉소로 정해졌다. 이때 왕실의 세보인 선원세보를 비롯해 왕실 문서를 보관하던 건물이 ‘선원각’이었다. 이후 1719년부터 1910년까지 전등사의 가장 어른 스님에게는 도총섭이라는 지위가 주어졌다. 도총섭은 조선시대 최고의 승직을 일컫는 말이다. 1726년에는 영조 임금이 직접 전등사를 방문해 ‘취향당’ 편액을 내렸는가 하면 1749년에는 영조가 시주한 목재를 사용해 전등사의 중수(重修) 불사가 이뤄지기도 했다. 이 때 대조루도 함께 건립되었다.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서 전등사는 더욱 빈번하게 왕실의 지원을 받는 사찰로 부각되었다.

 

 

 

 

 

윤장대(輪藏臺)

전등사와 보문사에 윤장대(輪藏臺)가 있다. 윤장대는 경북예천군 용문사에 있는 보물제684호인 윤장대와 같은 것으로 불교 경전을 넣어 보관하는 책장인데 축을 달아 돌릴 수 있게 만들어진 것이다. 이윤장대를 한번 돌리면 경전을 읽은 것과 같은 공덕이 있다고 한다 .

 

 

보호수 은행나무

전등사에는 두 그루는 커다란 은행나무가 있다. 수령이 5백 년이 넘는 나무들이다.
한 나무는 노승나무, 다른 한 나무는 동승나무로 불리는가 하면 암컷, 수컷으로 불리기도 한다. 은행나무는 암컷과 수컷이 서로 마주보고 있어야 열매를 맺는다.
그런데 전등사 은행나무는 꽃은 피어도 열매가 맺지 않는다고 한다.
이 신기한 나무들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다.

강화도령 철종 임금 때의 일이다.
조정에서는 전등사에 은행을 스무 가마나 바치라고 요구한다. 전등사 은행나무는 기껏해야 열 가마밖에 열매를 맺지 않는데 스무 가마를 요구하니 관리들의 횡포가 이만저만 심한 게 아니었다.

이 지시를 듣게 된 동승이 노스님께 고했다.
“스님! 정말 관가에서 너무들 하는 것 아닙니까요?”
“허허, 참으로 난감한 일이다. 얘야, 그렇다고 그 사람들을 미워해선 안 되느니라. 참아야 하느니…….”
노스님은 이렇게 타일렀지만 자신도 깊은 고민에 빠졌다.
은행 스무 가마를 내놓을 수도 없었고 관리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더욱 더 불교를 탄압할 것이 분명했다. 노스님은 하는 수 없이 백련사에 있는 추송 스님에게 도움을 청하기로 했다. 추송 스님은 도력이 높기로 소문이 난 분이었다.
며칠 후 추송 스님이 전등사에 나타났다.
곧 전등사 일대에 ‘전등사 은행나무에서 은행이 두 배나 더 열리게 하는 기도가 있을 것’이라는 소문이 퍼졌다.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추송 스님의 3일 기도를 지켜보았다. 그 중에는 관리들도 섞여있었다.
“어떻게 은행이 두 배나 많이 열린단 말인가?”
“맞아! 추송 스님이 제 아무리 정성을 드려도 소용없는 짓이겠지.”
사람들은 저마다 이렇게 수군거렸다.
이윽고 기도가 끝나는 날이었다.
갑자기 추송 스님의 기도를 지켜보던 관리들의 눈이 얻어맞은 것처럼 퉁퉁 부어버렸다.
“이제 두 그루의 나무에서는 더 이상 은행이 열리지 않을 것이오.”
추송 스님이 기도를 끝내고 사람들에게 말했다.
사람들은 저마다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바로 그때 때 아닌 먹구름이 전등사를 뒤덮더니 비가 무섭게 내렸다.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며 일제히 땅에 엎드렸다.
얼마 후 사람들이 고개를 들었을 땐 추송 스님은 물론 노스님과 동자승까지 모두 사라졌다. 사람들은 보살이 전등사를 구하기 위해 세 명의 스님으로 변해 왔다고 믿게 되었다. 그 때부터 전등사 은행나무는 열매를 맺지 않았다.

 

 

 

 

 

 

 

 

 

 

 

 

 

 

 

 

 

 

 

 

대웅전 보물 제 178호

 

전등사 대웅전은 조선 후기의 목조건축물로 전등사의 중심 예배공간이다. 전등사는 고구려 381년(소수림왕 11) 아도화상이 세웠다고 전하지만 고려 중기까지의 역사는 확실히 알 수 없다. 조선 1605년(선조 38)과 1614년(광해군 6)에 큰 불이 일어나 절이 모두 타버려, 그 이듬해 다시 짓기 시작하여 1621년(광해군 13)에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고 한다. 이 대웅전도 1621년에 지어졌는데, 규모는 앞면 3칸·옆면 3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한 장식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이다. 규모는 작지만 단정한 결구에 정교한 조각 장식으로 꾸며져서 조선중기 건축물로서는 으뜸으로 손꼽힌다. 내부에는 석가여래 삼존과 1880년에 그린 후불탱화, 1544년 정수사에서 개판한 법화경 목판(木板) 104매가 보관되어 있다. 현재의 건물은 1621년(광해군 13)에 지은 정면 3칸, 측면 3칸 형식의 목조 건물이다. 정면 3칸은 기둥과 기둥 사이를 같은 길이로 나누어 빗살문을 단 형식이다. 기둥은 대체로 굵은 편이며 모퉁이 기둥은 높이를 약간 높여서 처마 끝이 들리도록 했다. 대웅보전의 외관상 특징은 우선 비슷한 시기의 다른 건물에 비해 곡선이 심한 지붕과 화려한 장식 등의 특징을 보여 주고 있다. 

 

대조루

문화재자료 제 7호

대웅보전 앞 마당 바로 밑에 세운 대조루는 기둥을 세워 지면과 사이를 두고 지은 누각이다. 1748년(영조 24) 주지 초윤(楚允)과 화주인 보학(寶學) 등이 고쳐지었다고 하며, 1841년(헌종 7)에는 화주 연홍 등이 중건했다고『전등사본말사지』에 명기되어 있다. 그 뒤 크고 작은 보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앞면 5칸·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새 날개 모양의 익공 양식으로 비교적 간략한 수법이다. 원래 대조루의 건물 용도는 사중의 행사 및 연회나 손님 접대 등의 목적으로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대조루 안쪽부터가 본격적인 불국 정토이자 성스런 수행 공간이 된다. 특히 대조루 계단 아래서 대웅전의 본존불을 향한 자연스러운 조망이 가능토록 포치한 주의 깊은 건축 설계는 부처님에 대한 존신과 귀의를 더욱 고취시키는 효과를 나타내고 있다.

 

 

 

 

 

 

 

 

 

 

 

 

 

 

 

 

 

 

 

 

 

 

범종(철종) 보물 제393호

이 종은 1097년(북송 소성 4)에 중국 회주(懷州) 수무현(修武縣) 백암산(百巖山) 숭명사(崇明寺)에서 주조된 철제 종이다. 종의 형태는 정상에 두 마리의 용을 갖추고 용 머리 주변에는 16개의 연꽃잎을 돌렸으며, 종의 몸체에는 위쪽에 8잎을 돌리고, 그 밑으로 여러 개의 옆 띠로 위아래를 구분한 다음 위아래 각 8개의 네모 구획을 마련하였다. 이 네모 구획과 구획 사이의 길쭉한 공간에는 명문(銘文)을 양각하였다. 종구(鍾口)는 중국 종에서 보이는 물결 모양을 이룬 듯한 8모로 되어 있고 그것을 따라 소문(素紋)의 구연대(口緣帶)를 돌렸다. 전체적인 형태는 개성(開城) 연복사동종(演福寺銅鐘)과 유사하다. 우리나라에서 중국의 철제종이 보물로 지정된 유일한 종으로 중국제 철종 연구에 귀중한 자료다. 특히 명문(銘文) 중에는 이 종을 주조할 때의 시주인, 동역인(董役人), 장인 등의 성명이 양각되어 있다. 종의 크기는 높이가 1.64m에 입지름이 1m이다. 일제강점기 경기도 부평(富平) 병기창에 있던 것을 광복 후 독실한 불교신자에 의해 다시 전등사에 보관되어 현재에 이른 종이다. 전체적인 종의 형태가 웅장하고 소리가 청아하며 중국 종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는 문화재이다.

 

 

 

 

명부전

 

 

 

 

 

 

 

 

약사전. 보물 제179호

전등사 약사전은 조선 중기의 목조건물이다. 전등사는 고구려 381년(소수림왕 11) 아도화상이 세웠다고 전하지만 고려 중기까지의 역사는 확실히 알 수 없다. 조선 1605년(선조 38)과 1614년(광해군 6)에 큰 불이 일어나 절이 모두 타버려, 1621년(광해군 13)에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고 한다. 대웅보전 서쪽에 있는 아담한 약사전은 중생의 병을 고쳐준다는 약사여래를 모시고 있는 법당이다.「대웅전약사전개와중수기(大雄殿藥師殿改瓦重修記)」에 조선 1876년(고종 13) 대웅보전과 함께 기와를 바꾸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실제로 약사전의 지붕을 덮고 있는 명문 기와에서 1644년(인조 22)에 기와를 중수하였다는 이른 시기의 기록이 발견되었다. 건물의 구조나 양식으로 보아 건축 수법이 대웅보전과 비슷하여 조선 중기 건물로 짐작하고 있다. 규모는 앞면 3칸·옆면 2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과 비슷한 팔작지붕이다. 건물 안쪽 천장은 우물 정(井)자 모양이며 주위에는 화려한 연꽃무늬와 덩굴무늬를 그려 놓았다.

 

2점의 유형 문화재도 내부에 있다.

 

유형문화재43호   현왕탱. 사람이 죽은 지 3일 만에 심판하는 현왕과 그 권속을 도상화한 것이다.

유형문화재44호  후불탱화. 천이나 종이에 그림을 그려 액자나 족자 형태로 만들어지는 불화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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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부전

     

     

    월송요.무설전

     

     

     

     

     

    적묵강.종무소

     

     

    보호수

     

     

     

     

     

     

     

     

     

     

     

     

     

     

     

     

     

     

     

     

     

     

     

     

     

     

     

     

     

     

    동문을 통하여 전등사를 아웃하는 시강 여행 이었습니다.

     

    블친 여러분 추석 명절을 맞이하여 가내에 풍성한 한가위 되시시를 기원 합니다.

    들판은 누렇게 익어 고개를 숙인 벼를 보고. 코스모스 한들한들 피어있는 신작로를 보면 완연한 가을길이 깊어만 갑니다.

    마음이 풍성하고 일상에 늘 평화와 행복 가득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