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조선후기의 이궁(離宮) 경희궁

2014. 9. 13. 20:58문화재를찾아서/한국사기행

경희궁(慶熙宮)

 

조선시대의 궁궐이다. 광해군 9년(1617)에 지은 궁궐로 조선 후기에는 본궁을 떠나 잠시 머무르던 이궁으로 사용되었다.
원래 이름은 경덕궁이었으나 영조 36년(1760)에 경희궁으로 바꿨다. 순조 29년(1829)에 화재로 대부분 건물이 불에 타 없어졌으며, 1831년에 새로 지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인을 위한 경성중학교가 들어서기도 하였고, 숭정전 등의 중요한 전각들이 대부분 헐려 나가는 등 수난을 당하였다.
1987년부터 복원사업이 시작되어 현재 왕의 공식행사가 행해진 숭정전, 경희궁의 정문인 홍화문, 돌다리 금천교, 신하들과 회의를 하던 자정전, 영조의 어진을 보관하던 태령전 등을 만날 수 있다.

 

 

 

흥화문(興化門)

조선 광해군 8년(1616)에 세운 경희궁의 정문이다. 그러나 일제가 경성중학교를 건립하고자 궁내의 많은 전각을 헐면서 그 기능을 상실했다. 그 후 일제는 1932년 남산 자락에 이등박문(伊藤博文)을 위한 사당인 박문사(博文寺)를 건립할 때 정문으로 사용하였다. 해방후 박문사는 폐사되고 흥화문은 영빈관(迎賓館) 및 신라 호텔의 정문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1988년 서울시는 경희궁 복원 계획의 일환으로 흥화문을 지금의 자리로 이전(移轉) 복원하였다. 그러나 원 자리는 동향을 보고 배치했다고 하나, 그 위치는 현재 찾기 힘들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우진각 지붕의 다포 양식 건물로, 정전인 숭정전, 황학정과 더불어 건축적 성격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이다.

 

 

서궐도안

보물 1534

서궐(西闕)은 경복궁(北闕)의 서쪽에 있는 궁궐, 즉 경희궁(慶熙宮)을 의미한다. 1720년(광해군 12)에 영건된 경희궁의 원래 이름은 경덕궁(慶德宮)이었으나 1760년(영조 36)에 경희궁으로 개 명하였다. <서궐도안>은 이 경희궁의 전경(全景)을 그린 그림으로, 국보 제249호로 지정된 <동 궐도>와는 달리 채색이 가해지지 않은 밑그림 형태로 전해지고 있다. 1829년 경희궁의 여러 전각이 화재로 소실되자 1830년 중건을 시작하여 1831년 완성하였는데, ·서궐영건도감의궤(西闕營建都監儀軌)·를 통해 경희궁 중건에 관한 자세한 상황을 알 수 있다. 이 의궤와 <서궐도안>을 비교하면 부분적으로 차이가 발견되어 <서궐도안>은 중건 이전의 모습을 담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 <서궐도안>은 수묵으로만 그리는 백묘(白描)의 계화(界畵) 양식으로 그린 것으로, 먹 아래에 는 밑그림이 남아 있는 부분이 있다. 산수 묘법과 나무를 그리는 수지법에서는 비수(肥瘦)가 있 는 필치로 회화적 표현이 두드러진다. 건물은 자를 대고 윤곽선을 명료하게 긋고 있으며 각 건 물의 지붕에 이름을 써 넣었다. 현재 대부분의 전각이 이건, 변용, 훼철되어 버린 경희궁의 옛 모습을 한눈에 살필 수 있을 뿐 만 아니라 정밀하고 자세한 묘사로 복원의 토대가 되는 중요한 그림이다. 또한 작화 과정의 일 단을 짐작할 수 있는 밑그림이란 점에서도 주목된다.

 

 

 

현재 복원된 안내도

 

 

흥화문을 지나 내안으로 진입을 하게된다.

 

 

200여m 남짓 걷다보면 숭정문이 기다라고 있다.

 

 

숭정문(崇政門)

숭정문 앞에 도달하니 웅장함이 한층 더하고 단청또한 복원의 시기를 알려 주기도 한다.

 

 

경희궁지(慶熙宮址)

“허망하게 무너진 광해군의 꿈”
조선시대 궁궐터. 경희궁에 임금이 거처하기 시작한 것은 인조 때부터인데, 이괄의 난 이후 임금이 거처했던 창경궁이 불에 타자 경희궁으로 옮긴 것이다. 경희궁은 원래 인조의 생부인 원종(정원군)의 집이 있던 곳이다. 경희궁에는 정전인 숭정전을 비롯해서 편전인 자정전, 침전인 융복전, 회상전 등 100여 동의 크고 작은 건물이 있었다. 흥선대원군 시절과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건물의 상당수가 자리를 옮겨가는 등 많은 수난을 겪었다. 1987년부터 경희궁지에 대한 발굴을 시작해 숭정전과 회랑, 흥화문 등을 복원했다

 

광해군은 왕권을 유지하기 위해 재위기간의 대부분을 궁궐을 짓는 일에 힘을 쏟았다. 경희궁은 인왕산 아래 왕이 탄생하는 기운이 서려 있다는 풍수가의 말을 듣고, 이복동생인 정원군의 집을 강제로 빼앗아 그 터에 지은 것이다. 그러나 인조반정이 일어나 새 궁궐에는 발조차 들이지 못했다. 인조는 광해군을 폐출시키고 임금에 올랐으나 반정의 내란통에 창덕궁의 주요 전각들이 소실되고, 곧이어 이괄의 난으로 창경궁의 전각들마저 소실되어 경희궁으로 거처를 옮겨 정사를 보게 되었다.

 

원종의 집터에 세워진 조선후기의 대표적인 이궁이다. 원종(1580∼1619)은 선조의 5째 아들이자 인조의 아버지로 후에 왕으로 추존되었다. 광해군 8년(1616)에 세워진 경희궁은 원래 경덕궁 이었으나 영조 36년(1760)에 이름이 바뀌었다. 원래의 규모는 약 7만여평 이었다. 그러나 민족항일기인 1907년부터 1910년에 걸쳐 강제로 철거되어 궁궐로서의 존재가치를 상실하였고 궁터도 철저하게 파괴되고 변형되어 결국 현재의 규모로 축소되었다. 경희궁에는 부속건물로 회상전, 융복전, 집경당, 흥정당, 숭정전, 흥학문, 황학정이 있었는데 융복전과 집경당은 없어졌다. 나머지 건물은 1910년 지금의 서울고등학교가 설립된 후, 회상전은 조계사로, 흥정당은 광운사로, 숭정전은 조계사에 옮겼다가 다시 동국대학교 안으로, 흥화문은 박문사로, 황학정은 사직공원 뒤로 각각 옮겨져 보존되고 있다. 현재 이 자리에 궁궐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유물로는 정전이었던 숭정전의 기단부와 제자리에서 옮겨진 석수, 댓돌 등이 있고 이 밖에 바위에 새진 글이 남아있다. 공터 북쪽에 돌로 쌓은 축대의 길이는 약 100m로 건물로 오르는 계단에는 용머리조각과 구름무늬가 있어 주목된다.

 

숭정문 바로 옆에 서있는 경희궁지의 안내판이 경희궁의 역사를 자세히 알려주고 있다.

 

 

숭정문을 올라가는 계단에 봉황의 석물

 

 

숭정전(崇政殿)

경희궁은 조선 광해군 9년(1617)부터 12년(1620) 사이에 지어진 궁궐로 임금이 항상 머무르던 곳이 아니라 본궁을 떠나 잠시 머무르던 이궁이다. 광해군 10년(1618)에 지어진 숭정전은 경희궁의 정전으로, 임금이 신하들의 조례를 받고 공식적인 행사를 하던 곳이다. 그러나 1910년 일본인들에 의해 강제로 철거되어 1926년 조계사로 옮겨 세워졌다가 현재는 동국대학교 안의 정각원이라는 법당으로 쓰이고 있는데, 내부가 불교 의례를 행하기에 알맞게 변형되어 있다. 앞면 5칸·옆면 4칸 규모로,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지붕을 받치면서 장식을 겸하는 공포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의 건물로 정전다운 품격을 갖추고 있다. 경희궁에 있던 건물 중 가장 크고 화려하게 지어진 장엄한 건물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서울시에서는 1985년부터 5차례의 발굴 조사를 실시했고, 그 결과를 토대로 숭전전을 6년에 걸쳐 복원했다. 경희궁 숭정전은 창경궁 명정전과 함께 조선 중기 궁궐건축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숭정전 약쪽의 전경(좌)

 

 

 

 

 

우측의 전경

 

 

 

 

 

 

 

 

 

 

 

숭정전의 어전

 

 

숭정전의 좌우

 

 

 

 

 

 

 

 

숭정전의 천정 룡 문양

 

 

 

 

 

자정문

 

 

 

 

 

자정문을 지나 좌,우측의 전경

 

 

 

 

 

자정전

경희궁의 편전. 1617~20년(광해군 9~12)사이에 건립 되었다. 국왕이 신하들과 회의를 하거나 경연을 여는 등 공무를 수행하던 곳이다. 숙종이 승하 하였을때는 빈전으로 사용되었으며. 선왕들의 어진(초상화)이나 위폐를 임시로 보관 하기도 하였다.

일제가 헐어 내었던 것을 서울시에서 발굴하여 확인한 자리에<서궐도안>에 따라 현재의 건물을 복원 하였다.

 

 

 

 

 

자정전 뒤편의 암릉들

 

 

서암(瑞巖)

태령전 뒤에 있는 기이한 모양의 바위. 암천(巖泉)으로 불리는 바위속의 샘이 있어 예로부터 경희궁의 명물 이었다. 본래는 왕암(王巖)으로 불러 왔는데 그 이름으로 인하여 광해군이 이 지역에 경희궁을 지었다는 속설도 있다. 1708년(숙종 34)에 이름을 서암으로 고치고 숙종이 직접 "瑞巖" 두 글자를 크게 써서 새겨두게 하였다. 그러나 현재 서암을 새겨두었던 사방석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태령전

영조의 어진을 보관하던 곳 본래는 특별한 용도가 지정되지 않았던 건물 이었다.

그러나 영조의 어진이 그려지자. 1744년(영조 20)에 이곳을 중수하여 보관 하였다. 일제에 의해 파괴 되었지만 2000년<서궐도안>에 따라 정면 5칸. 측면 2칸의 건물로 복원 하였다. 현관은 석봉 한호의 글씨를 집자하여 만들었다.

 

 

영조의 어진

 

 

자경전의 측면 전경

 

 

서암전경

 

 

 

 

 

 

 

 

 

 

 

 

 

 

 

 

 

 

 

 

 

 

 

 

 

 

금천교(錦川橋)

경희궁의 흥화문과 경희궁내의 여러전각들 사이에 흐르던 금천(禁川)에 놓여진 돌다리. 난간의 돌짐승들이나 홍예사이에 새겨진 도깨비 상은 대궐 바깥의 나쁜 기운이 궐내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려는 상징성을 띠는 것이다. 1619년(광해군11) 건립되었던 것을 일제가 매몰시켰지만 서울시에서는 2001년에 복원 하였다.

 

 

 

 

 

금천교를 건너오면 큰 조각상과 그 사이로 남산의 기운 타워가 눈앞에 들어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