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유네스코 세계유산 건릉

2013. 7. 25. 23:35문화재를찾아서/한국사기행

메롱세계유산 조선왕조 건릉을 이어 연재 합니다.

 

건릉 (健陵)

조선 제22대 정조와 효의왕후의능

정조(正組(1752~1800) 재위1776~1800)는 추존 장조(사도세자)의 둘쨰아들로

1776 제21대 영조가 승하하자 왕위에 올랐다. 즉위직후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라고 천명하고 아버지의 원혼을 위로하기위해 노력을 다했다.

문무에 겸비했던 정조는 규장각을 두어 학문연구에 힘쓰고. 장용영을 설치하고 수원 화성을 쌓는

등 조선의 중흥을 이끌었다. 또한 영조의 탕평책을 계승하여 봉당정치의 폐해를 막기 위해 힘썻다.

효의왕후는 좌참찬 청원 부원군 김시묵의 딸로 1762년 세손빈에 책봉 되었고. 정조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지성으로 모셔서 영조의 총애를 받았다.1776년 정조가 즉위하자 왕비로 책봉되었다.

 

 

소풍건릉 연혁

-1800년(정조24)정조안장. 현륭원 동쪽 두번째 언덕에 조성(초장)

-1821년(순조21)현륭원 서쪽 산줄기 지금의 자리로 천장 효의왕후와 합장

 

슬퍼3건릉 제향일

-매년 5월 둘째 일요일(양력)

 

 

융.건릉 종합 안내도

 

 

정문에서 왼쪽으로 역사 문화관이 있습니다.

 

 

장조와 정조 가계도 와 융릉 건릉 설명문

 

 

 

 

 

 

조선왕릉 분포도

 

 

 

 

 

 

 

 

 

 

 

 

 

 

 

이정표 위치로 다시 오게 되었습니다

이제 건릉을 향합니다

 

건릉 입구와 건릉 주위는 특히 참나무 숲이 울창 합니다

 

 

 

좌우에 분포되어 있는 참나무 그루들

다른 릉에 가면 대다수가 소나무 숲으로 이루어저 있지만

건릉은 남다른 모습을 볼수 있어요

 

홍살문  여기 부터는 조선 왕릉 유사하므로 특별한 설명 제외 합니다.

 

 

 

 

 

 

 

 

 

 

 

 

 

 

 

 

 

 

 

 

 

 

 

 

 

 

 

 

 

 

 

 

 

 

 

 

 

 

 

 

 

 

 

 

 

 

멀리서만 바라 봅니다 좀은 아쉬워요............

 

 

 

 

 

 

 

탐방후 내려 오면서 소나무 숲을 다시 담았습니다.

 

 

 

 

 

 

재실 후면의 전경

 

 

 

 

 

 

 

 

 

 

 

 

 

 

 

뿌잉3"호학군주가 고민하는 기막힌 반전"

흔히 우리가 알고있는 정조는 온 신하들의 스승이라 불릴 정도로 학식과 덕망을 지닌 호학 군주이가.

그런데 화성행궁 화령전에 봉안된 정조의 초상화는 곤룔포가 아닌 군복 차림이다.

틀에 박힌 정조의 이미지에서 살짝만 벗어나면 우리가 익히 알던 호학군주의 또 다른 면모를 만날수 있다.

조선시대 왕실 족보[선원 보락]에서 볼수있는 간략한 그림과"우뚝한 콧마루. 네모난 입에 겹으로 된 턱"

을 가지고 있었다는 순조실록의 기록을 따르자면 정조의 시체 얼굴은 다부진 모습일 확률이 높다.

그 모습을 상상 해보건대 의외로 정조에게서 늠름하고 호방한 무인의 기상이 느껴진다.

 

 

"우리나라는 문치를 숭상하고 무비를 닦지 않으므로. 사람들이 군사에 익숙하지않고 군병이 연습하지 않아서 번번히 조금만 달리면 다들

숨이차서 진정하지 못한다.  이를 장수는 괴이하게 여기지않고 군병은 예사로 여기니. 어찌 문제가 아니 겠는가.

훈련대장 홍국영과 병조판서 정상순은 이에 힘쓰도록 하라"

 

정조는 문치뿐만 아니라. 무예와 군사훈련역시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왕위에 오른후 정조는 아주 의미심장한

 정예부대를 육성하는데. 국왕의 친위 부대인 장용영이 그것이다. 왕궁이 있는 서울과 그 주변을 지키는 임무를 맡은

장용영은 그 훈련부터 특별했다. 정조가 친히 활쏘기 시범을 보이며 훈련을 독려하기도 했다.

실제로 정조의 활쏘기 실력은 당시에 그를 따를자가 없을 만큼 출중했다. 정조실록 16년 10월 30일에는

정조가 춘당대에서 활쏘기를 하여 10순중(50발)49발을 명중 시켰다.

 

"다 쏘는것은 옳지 않다. 내가 요즈음 활쏘기에서 49발에 그치고 마는 것은 모조리 다 명중 시키지 않기 위해서이다"

 

라고 말했다고 하니 그의 여유 넘치는 자신감을 엿볼수 있는 대목이다.

정조는 강단있는 모습은 8일간의 화성 행차에서 절정을 이룬다. 115명의 기마악대의 웅장한 연주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6000여명의 수행원이 그 뒤를 따랐다.  이 거대한 행렬의 목적지는 수원 화성 왕위에 오른후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라고 선언했던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인 현륭원 으로 향하는 길 이었다.

 표면적으로는 어머니의 회갑을 맞아 아버지의 무덤을 찾아가는 행차였지만. 그 이면에는 그간 다져 왔던 왕권을

과시하고 정치개혁에 박차를 가하려는 정조의 야심찬 목적이 숨어 있었다.

이날 화려한 곤룡포를 벗고 군복으로 무장한 채 화성으로 향하는 정조의 모습에서 화성 행차의

감회가 어떤 것이었을지 짐작이 간다.

 

졸려한편 2009년 2월에 이르러서야 세간에 공개된(정조 어찰첩) 정조의 또 다른 면모를 보여준다.

당시 정치적으로는 반대 입장에 이었던 신하 심환지와 주고 받은 비밀 서신에서 치밀한 전략가였던

 정조의 면면을 볼수 있으며 거기에 더해 껄껄대며 배를잡고 웃었다.

와 같은 가벼운 어투로 자신의 솔직한 마음을 편하게 표현한 정조의 새로운 모습도 발견할 수 있다.

정조를 온화하고 부드러운 호학군주로만 기억하는 이들에게 고하는 기막힌 반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