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유네스코 세계유산 융릉, 건릉

2013. 7. 23. 21:54문화재를찾아서/한국사기행

오케이3세계문화유산 융릉 건릉을 찾았습니다

우선 융릉으로 향하여 봅니다

 

융릉(隆陵)

장조(1735~1762.사도세자)는 제21대 영조의 둘째 아들이자 제22대 정조의 생부이다.

어려서부터 영특하고 서예와 무예에 뛰어났으나 영조를 대신하여 정치업무를 보게 되면서

노론과 마찰을 빚게 되었고 나경언의 고변으로 결국 뒤주에 갇혀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1762년 영조는 28세 나이에 죽은 세자를 슬퍼하면서 사도라는 시호를 내렸다.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가 즉위하자 존호를 장헌으로 올렸고 1899년에 장조로 추존 되었다.

헌경왕후는 영의정 영풍부원군 홍봉한의딸로 1744년 세자빈으로 책봉 되었다.

사도세자가 세상을 뜬후 혜빈 정조 즉위 후에 궁호를 혜경으로 올렸다.

혜경궁 홍씨의 자전적 회고록이자 궁중 문학의 백미라고 평가받는 "한중록"을 남겼다.

1899년 사도세자가 장조로 추존 되면서 헌경왕후로 추존 되었다.

 

융릉 연혁

-1789년 (정조13) 양주 배봉산(지금의 동대문구 휘경동)에 있던 영우원을

  지금의 자리로 옮기고 현륭원이라 고처부름

-1816년 (순조16)헌경왕후(혜경궁홍씨) 합장

-1899년 (광무3)장종으로 추존.융릉으로 높임.장조의 황제로 추존

 

융릉 제향일

-매년 4월 둘째주 일요일 (양력)

 

 

정문으로 들어 갑니다

 

 

 

조선왕릉 세계유산 표지석

 

 

사적 제 206호

 

 

재실 전경 입니다

 

 

 

 

 

 

재실 후면부 전경 입니다

 

 

이제 융릉으로 출발을 합니다

 

 

양쪽으로 우거진 소나무 숲길

조선완릉의 특징중 하나 입니다

 

건릉 방향과 융릉 방향의 이정표 입니다

 

 

융릉을 향하는 곳의 방향에도 소나무 숲

 

 

가는도중 털중나리가 곱게 피어 오가는 이들에게 인사를 합니다

 

 

융릉 앞의 넓은 공원 이 넘 아름답게 조성이 되어 있구요

 

 

하늘을 향한 소나무는 하늘 높은줄 모르는가 봅니다

 

 

이다리의 이름은 금천교 입니다

왕릉의 금천을 건너는 다리로서 속세와 성역의 경계 역할을 합니다

 

 

바로 우축으로 길게 나있는 산책로가 더욱 아름답기만 하더군요

 

 

홍살문:신성한 지역임을 알리는 문. 붉은칠을한 둥근기둥 2개를 세우고 위에는 살을 박아 놓았다

홍문 또는 홍전문 이라고도 한다.

 

 

융릉을 설명해주는 입간판이다

 

 

배위라고 합니다

왕이능역에 들어서면서 경건한 마음으로 절을 하는곳입니다

 

 

왼쪽으로부터 신도 참도 어도라 한다

참도는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 이어진 길이며 박석을 깔아 놓았다

왼쪽의 약간 높은길은 신이 다니는 길이라하여 신도라고 하며 오른쪽 약간 낮은길은

임금이 다니는 길이라하여 어도라 한다

 

 

수라간의 전경 입니다

 

 

정자각 전경 입니다

능 제향을 올리는 정자 모양으로 지은집

제향을 올릴때 왕의 신주를 이곳에 모신다

 

 

 

 

 

 

정자각 단청

 

 

제향을 올리는 차례상의 모습

 

 

정자각코너의 단청

 

 

비각 전경

왕의 행적을 적은 신도비나표석을 보호하는 건물

 

 

 

 

 

 

 

 

 

 

연꽃이 있어야 하나 금붕어만 살고 있내요

 

 

보호시설이 되어있어 직접 볼수는 없었습니다

멀리서 볼수 있는것은 석마 무인석 문인석 장명등 등이 볼수 있습니다

 

 

융릉전경 당겨보니 곡장도 보여 지내요

비각의 전경

 

 

곤신지에서 나오는길 입니다

 

 

 

 

 

 

세계유산은 이토록 아름다음이 전세계에 알려저 있음에 무한한

마음이 가득하였읍니다

지금까지 봐주신 여러분 감사를 드립니다

 

사진의 분량이 많은 관계로 건릉은  부득이 다음편이 이어 집니다

감사 합니다

 

 

 

실록으로 엿보는  왕  과  비

 

"뒤주의 비극속에 가려진 아버지의 마음"(추존 장조_사도세자)

"네가 자결하면 종묘사직을 보존할 수 있을 것이다. 어서 자결하라"

영조의 노여움은 시강이 지나갈수록 격해졌다. 땅에 조아린 세자의 이마에선 피가 흘렀다.

영조가 칼을들고 자결을 재촉하니. 세자가 눈물로 용서르르 빌었다.

그러나 임금의 노여움은 누그러들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살려만 달라는 세자의 절규를 외면하고 끝내 명을 내린다.

 

"세자를 페서인으로 삼고. 뒤주에 깊이 가두라!"

영조실록 38년(1762) 윤 오월 13일의 기록이다.

역사에 영원히 지워지지않을 사건. 뒤주에 갇흰 사도세자의 비극을 실록은 이렇듯 생생하게 그리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이 비극적인 역사의 현장에 사로잡흰 나머지.

간과하고 있는 중요한 사실 하나가 있다.

 영조에게 사도세자는 세상에 단 하나뿐인 아들.

더욱이대리청정을 시켰을 정도로 기대가 크고 귀하게 여긴 아들 이었다는 사실이다.

맏아들 효장세자를 일찍이 여의고 7년간 후사가 없어 애태우던 영조는 마흔둘에 이르러 사도세자를 얻었다.

그러나 영조의 아들 생각은 각별할수 밖에 없었다.

 

"지금 즐겁고 기쁜 마음을 어찌 말하랴? 내전에서 아들로 취하고 원자의 호를 정한는 일을 어찌 조금이라도

늦출수 있겠는가? 즉시 이를 거행해 종묘와 사직에 고하도록 하라" 영조실록 11년 1월 21일

영조는 아들이 태어난 순간부터 왕위를 물려줄 결심을 한다.

그리하여 조금도 망설임 없이 사도세자가 태어난 이듬해 왕세자로 책봉하고

신하들에게 온 정성을 다해 교육에 힘써줄 것을 부탁한다.

세자가 3세에 이르렀을 영조 13년 세자가 이미(효경)을읽고 글을 쓸줄 알았다는 기록이 실록에 남아있다.

이때 세자가 썻던 글이 " 천지왕춘" 이다.

이에놀란 여러 신하들이 앞 다투어 나와서 세자의글을 하사하여 줄 것을 청하니 영조는 기쁜 나머지

네가 주고 싶은 사람을 가르키라 하며 세자의 재간을 보았다고 한다.

후에도 영조는 여러 신하들이 모인 자리에 세자와 동행하여 세자가 쓴 글씨를

신하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했다. 영조역시 아들의 재능을 세상에 알리고 싶은 여느 아버지와 다를바 없었다.

그러나 세자의 대리 청정은 불행의 씨앗 이었다. 노론이 외면한 사도세자의 대리청정이

순탄할리없고 과도한 정신적 스트레스로 말미암아 괴이한 행동을 부렸던 사도세자는 끝내영조의 미움을

사게된다. 결국 사도세자를 뒤주에 갇히게 한 죄목은 이러했다.

정신질환으로 궁녀를 죽인것. 여승을 궁여로 만든것 그리고 아무도 몰래 20여일 동안이나

관서지방을 유람 수상한 행동 그러나 이는 겉으로 드러난 사실일뿐. 그 외면에는 더욱 무서운 정치적 이유가 도사리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손으로 아들을 처단해야 했던 아버지의 비극 또한 잠들어 있다.

왕과 세자 이기전에 부자 사이였던 두 사람의 스스럼없는 대화가 더욱 가슴 시린 것은 바로 그런 이유다.

 

임금이 열 살이 된 세자에게 묻기를 "글을 읽는 것이 좋으냐. 싫으냐?" 하니

세자가 한참동안 있다가 대답 하기를 싫을때가 많습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세자의 이 말은 진실한 말 이니 내 마음이 기쁘다. 하였다 

(영조실록 20년(1744년) 11월 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