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부평향교

2017. 12. 19. 07:25문화재를찾아서/서원·향교

부평향교(富平鄕校)


인천광역시 시도유형문화재 제12호

인천광역시 계양구 계산동 982-1


1127년(인종 5)에 현유(賢儒)의 위패를 봉안, 배향하고 지방의 중등교육과 지방민의 교화를 위하여 계양산(桂陽山) 아래에 창건되었다. 병자호란 때 소실되었다가 난 후 중건하였으며, 1921년에 대성전과 부속건물을 보수하였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6칸의 대성전, 7칸의 명륜당, 7칸의 동재(東齋), 내삼문(內三門), 각 4칸의 동무(東廡)와 서무(西廡) 등이 있다. 대성전에는 5성(五聖), 송조2현(宋朝二賢), 우리나라 18현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토지와 전적·노비 등을 지급받아 교관이 교생을 가르쳤으나, 갑오개혁 이후 신학제 실시에 따라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봄·가을에 석전을 봉행하며 초하루·보름에 분향을 하고 있다.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2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전교(典校) 1명과 장의(掌議) 수명이 운영을 담당하고 있다.[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향교의 역사-

고려 인종 5년(1127년) 계양산 남쪽에 건립

조선조 인조 14년(1636년) 병자호란시 화제로 인하여 소실

병자호란후 숙종 14년(1688년 8월 4일) 현위치에 재건

1943년 10월 15일 문학향교 위패를 부평향교에 합감하고 인천향교라 칭함

1946년 3월 해방후 문학향교를 복원하고 합감을 폐철하고 부평향교라 칭함

1990년 11월 9일 인천광역시 지정문화재(유형)12호로 지정되었다



-홍살문과 하마비-

홍살문은 향교 영역의 표시이며.. 대소인을 막론하고 하마 하여야한다.

말에서 내려 들어가는 문이다.



-외삼문-

교궁을 들어가는 출입문 동쪽 협문을 통하여 들어가고 나올때는 서쪽 협문을 통하여 나오는 문이다.

가운데 중문은 신 문이다.(행사때만 사용 한다)



-배치도-

1,홍살문 2,외삼문 3,명륜당 4,동재 5,서재 6,내삼문 7,동무 8,서무 9,대성전 10,교직사 11,화장실

문헌에 따르면 현재 배치된 건축물외에 전사청, 공수고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현재는 남아있지 않다.



-명륜당-

유생들이 사서오경을 공부하고 감독하며 초시준비와 향음주례 및 각종행사를 하던곳.

공부하던 학생의 정원은 72명이다.

명륜당은 합각지붕의 굴도리집이며, 재실은 네모기둥집이다



명륜당 앞에서 보는 외삼문과 교직사



향나무



-동재-

유생들의 기숙사 이다. 재실은 네모기둥집이다



-서재-

유생들의 기숙사 이다. 서재지만 남아 있었으나 1987년에 복원 되었다.



-내삼문-

대성전동과 서무를 출입하는 문이다.

동쪽문을 통하여 출입하고 서쪽문을 통하여 나오는 문이다.

중문은 시문이며 행사때만 사용한다.



-대성전-

용도 : 5성위와,정 주양공, 한국18현의 위패를 모시고 매년 5월 11일과 9월 28일에 석전을 드리고 매월 삭망(朔望)에 분향례를 드린다.

5성위 : 대성지성문선왕(공자), 복성공(안자), 종성공(증자), 술성공(자사), 아성공(맹자)

정.주양공 : 애국공 정호, 휘국공 주희

한국18현 동종향 : 홍유휴 설총, 문선공 안유, 문경공 김굉필, 문정공 조광조, 문순공 이황, 문상공 이이, 문원공 김장생, 문경공 김집, 문정공 송정길

한국18현 서종향 : 문창후 최치원, 문충공 정몽주, 문헌공 정여창, 문원공 이언적, 문정공 김인후, 문간공 성흔, 문열공 조헌, 문정공 송시열, 문순공 박세채



-대성전-

대성전은 박공지붕의 굴도리집이며 부연(附椽)을 단 겹처마지붕으로 시설되었다. 대성전의 앞퇴를 개방한 것은 제례의식을 위한 일반적인 공간구성이지만, 다른 지방의 향교에 비해 구조가 전반적으로 간소하다. 



-서무-

한국 18현중 서종향 9현의 위패를 모시던곳 현재는 사용치 않음


-동무-

한국 18현중 동종향 9현의 위패를 모시던곳 현재는 사용하지 않음



향나무의 귀이함



-망료위-

향사가 끝나고 축문을 태우는곳이다.



대성전의 뒤뜰 대나무 숲



향나무 곳곳에 고목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다



내삼문 동편과 서편에 은행나무 고목이 대성전을 지키듯 우뚝 서있다.


부평향교의 일화


열성위패(列聖位牌)

부평향교내에 봉안된 열성위패가 보존되기까지는 이를 지키려는 선비들의 두번에 걸친 헌신적인 노력이 있었다고 한다.

첫 번째는 임진왜란때 난이 발생하자 향교건물과 건물 내 위패가 소실될 것을 영려한 교생 박무영, 이언복, 박대충 등 3명이 위패를 모시고 계양산으로

피난하여 동굴에 숨겼다.

난이 끝난 후 부평향교에서는 위패를 다시 안전하게 봉안 하였지만 인근의 다른 향교들은 위패가 소실되어 부평향교 것을 본받아 만들어 봉안 하였다.

이러한 일이 알려지자 조정에서는 이를 가상히 여겨 참봉벼슬을 제수 하였다고 전한다.

두 번째는 병자호란때 청군이 부평을 통과하면서 부평도호부청사와 부평향교에 불을 질렀다.

향교가 불에 활활 타오를 때 동지사 송윤니 생명의 위협을 무릎쓰고 대성전 안으로 뛰어 들어가 공자를 비롯한 열성위의 위패를 모시고 나와 공촌동사저에

보관 하였다.

난이 끝난 후 숙종 12년(1688) 현위치에 향교를 재건 하면서 공촌동에 보관했던 위패를 봉안함으로써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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