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미/임진왜란 전략적 요충지 금오산성

2016. 8. 14. 08:38문화재를찾아서/성·산성·돈대

금오산 중턱의 금오산성


둘레 약 3.5㎞. 현재 남·서·중문 및 암문(暗門 : 누각이 없이 적에게 보이지 않게 만든 성문)과 건물지 등이 남아 있다.

처음 축조시기가 언제인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고려·조선시대로 이어지면서 입보피란(入保避亂:들어와 보호받으며 난을 피함)의 요충지로 이용되었던 대규모 산성이다.

이 성은 산의 정상부를 테뫼형으로 두른 내성과 정상부에서 북쪽을 향해 흐르는 큰 계곡을 끼고 포곡식으로 쌓은 외성의 이중구조로 되어 있다. 성벽은 높고 험한 천연의 암벽을 이용하여 공력(工力)을 줄였다.

조선시대 초기까지는 둘레 2.7㎞ 정도의 테뫼식 내성이 있었을 뿐이었으나, 여기에 고려시대 말에 선산·인동·개령·성주 등 주변 여러 고을의 주민들이 왜구를 피하면서 병정을 뽑아 지켰던 자취가 배어 있다.

조선시대에도 이곳에 군창(軍倉)을 마련해 놓고 선산·개령·약목 등의 주민이 입보할 수 있도록 양식을 저장하였고, 1410년(태종 10)부터 1413년까지에 걸쳐서 성을 수축하였다.

임진왜란 때에는 이 산성의 전략적 중요성이 새롭게 인식되어 1495년(연산군 1)에 성벽을 수축하고, 1597년(선조 30)에는 도체찰사의 영(營)을 베풀기도 하고 정기룡(鄭起龍)·이수일(李守一) 등이 지켰다.

1639년(인조 17)에는 대대적인 확장공사를 실시하여 외성의 북쪽에 있는 계곡을 둘러싸는 포곡식 외성을 쌓아 이중의 산성이 되었는데, 외성의 둘레는 약 3.5㎞이다. 1735년(영조 11)에는 선산도호부사가 산성별장(山城別將)을 겸하여 지키게 하고 3,500명의 병력을 배치하였다.

내성에는 남문·서문과 북쪽의 외성으로 통하는 중문이 있으며, 남서쪽의 산능선으로 따로 철성(凸城)을 452m나 축조하여 방어력을 높였다. 남문은 개구(開口)된 너비가 1.8m, 서문은 1.7m, 중문은 2m로 비교적 규모가 작으나, 바깥으로 문의 좌우에 성돈(城墩)처럼 보강된 모양을 보여주고 있다.

외성에는 북문에 해당되는 계곡 쪽의 출입문과, 그 반대편의 암문이 있다. 본래 외성의 출입문에는 6칸의 문루가 있었으나 지금은 문구부(門口部)만이 확인될 뿐이다. 암문은 너비가 1.2m, 높이가 1.1m로서 특이한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성벽 위의 여장(女墻 : 성위에 낮게 쌓은 담)은 너비 1.3m 규모였고 여장에는 사혈(射穴 : 총이나 활을 쏘게 만든 구멍)이 25×35㎝ 크기로 바깥쪽을 향해 경사지게 뚫려 있다.

성안에는 1868년에 건립된 것으로 보이는 중수송공비(重修頌功碑)가 있는데, 이로 미루어 현재 남아 있는 것은 이때 마지막으로 중수된 것으로 추측된다.[출처:한국민족대백과사전]

안내도에서 보는 금오산성 모습



종합 안내도



대동문 전경



대동문 내부에 천정에는 용의 형상이 그려져 있다.



성곽전졍



대동문의 상부의 전경






금오산성 중수기



산성에서 보는 사계의 풍경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