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양주/자전거 여행으로 가본 다산 정약용선생 유적지와 실학 생태 동산

2012. 6. 15. 11:56어디로갈까/축제·공원·테마

자전거 여행을 하면서 최소 인접의 가볼만한곳을 탐방 하였습니다.

많은 시간이 주어지지 않은 상황이 아쉬운 과정 입니다.

그러나 약속을 선행하기 위한 노력의 경주는 계속 될 것입니다.

 

그러면 다산 정약용 선생의 수학기 와 사환기(벼슬을 얻어 관료로 재직했던 기간)를

먼저 알아 보겠습니다.

 

-수학기-

다산은 자질이 영특하여 4세때 천자문을 배우기 시작 하였고 5세때 오언시를 지었는데

10세 이전의 저작을 모아 [삼미지집] (三眉子集)을 내었다고 하나 지금은 남아있지 않고

작은산이 큰산을 가렸으니

멀고 가까움이 다르기 때문이네

라는 시만이 남아 전한다

15세에풍산 홍씨에 장가를 들었고 16세에는 성호 이익의 유고를 처음보고 성호를 평생 사숙 하게 되었다.

이어 부친의 임지를 따라 화순. 예천. 진주등지에서 공부 하다가 22세때 소과에 생원으로 합격 하였다.

이것이 정조 임금과의 운면적인 첫 만남이었다.

23세에 큰형 약현의 처넘인 이벽으로부터 처음으로 천주교에 관한 서적을 얻어보고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이후 성균관에서 수학을 하면서 글을 지어 올려 정조로부터 여러차례 상을 받았으며. 왕이 다산을 특별히 사랑했다.

28세 되던해 봄에 드디어 문과에 급제하여 첫 벼슬로 희릉직장에 제수 되었다.

 

-사환기-

다산은 문과에 급제한후 초계문신에 임명 되었고.사간원 정언. 사헌부 지평등을 거치면서 의욕적인 관료 생활을 이아갔다.

31세에 부친상을 당했고 이해 겨울에는 화성의 성곽을 축조하는데 활차를 이용한 기중기를 사용함으로서 많은 경비를

절약케하여 정조의 신임이 더욱 두터워졌다. 33세에는 홍문관 교리 거처 홍문관 수찬에 제수 되었고.암행어사의 명을받고

연천지방을 순찰한 후 탐관오리들을 탄핵했다. 34세에 병조 참의가 되어 임금의 총애가 더욱 두터웠으나 중국인 신부

주문모 사건에 연루되어 반대파의 모함이 심해지자 정조는 다산을 금정도 찰방으로 좌천 시켰다가 5개월만에 불러들였다.

36세 되던해 6월에는 천주교를 신봉한다는 반대파들의 모함이 심해서 이른바 자명소를 올려 자신의 결백함을 밝히고

관직에서 사직하려 했으나 정조의 배려로 곡산 부사로 전보 되었다. 약 2년간 재임 하면서 선정을 배풀었으며 여기서

마과회통 을 저술했다. 38세에 다시 내직으로 들어와 병조참치.병조참의 등에 제수 되었지만 더욱 심해지는 반대파들의

공격을 이기지 못하여 사직소를 올리고 벼슬길에 나아간지10년만인 1800년(39세) 봄.처자를 이끌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다산의 18년 강진 유배 생활 중 1808년(순조80부터 10년동안 거처하던 다산 초당 약110m 정도 떨어진 곳에 세워진 정자로

이곳에서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심신을 달래고 소일을 하였다고 한다

아쉽게도 이모두가 전남 강진에 있어서 다상 정약용 선생의 정갈한 낭만을 간접적으로 느껴볼수 있도록 이곳 다산 문화의 거리에

일부를 재현 연출 하였다,

 

 

 

 

 

책의 모양을 형상화하여 만든 석조 탑 입니다.

 

 

 

 

 

1808년 겨울 다산에서 정약용 선생의 글 비 입니다.

 

 

 

 

 

다산 정약용 선생의 글을 담아 책 모양의 석조 조형물 입니다.

 

 

 

 

 

목민심서가 수록 되어 있습니다.

 

 

 

 

 

다산 정약용 선생 (1762~1836)의 묘

                                        경기도 기념물 제 7호

 

정약용 선생은 이곳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당시의 광주군 초부면 마현)에서 아버지 나주정씨 재원과 어머니 해남 윤씨(고산 윤선도의 후손)

사이의 막내 아들로 태어나셨다 이곳 마현(마재)마을은 선생이 태어나시고 묻히신 곳이다. 위로 이복 맏형인 약현과 동복형인 약전 약종

그리고 누이(매형이 이승훈)가 계셨다

서울에서의 관직생활(1783~1800)과 전라남도 강진에서의 유배생활(1801~1818)을 제외 하고는 주로 이곳에서 생활을 하셨다.

선생은 반계 유형원.성호 이익 선생의 뒤를이어 조선시대 실학사상을 집대성한 분으로 조선 후기 개화사상가들 에게도 큰 영향을 주었고

문도공 이리는 시호를 받았다.

선생은 1표 2서(경세유표.목민심서.흠흠신서)로 대표되는 500백 여권의 경집과 문집을 저술 하셨을뿐 아니라 세계 문화유산의 하나인 수원의

화성을 설계 하셨고 거중기등의 과학기구를 제작하셨으며 마과회통 등의 의학 서적도 남기셨다.

선생의 학문적 관심은 오로지 [수기안인] 즉어떻게 자신의 몸과 마음을 닦아 백성들의 삶을 행복하게 할 수 있겠는가? 에 있었다.

현제 국립 서울 대학교 사회 과학대학 로비에는 선생의 초상화가 걸려져 있는데 한국 최대의 사회 과학자 라고 적혀 있다.

 

 

 

 

 

다산 정약용 선생의 생가 입구 입니다.

 

 

 

 

 

외부에서 바라본 생가의 전경 입니다.

 

 

 

 

 

외양간의 소가 한마리 있네요(만들어진 형상 입니다)

 

 

 

 

 

현제의 거실과도 같은 용도인 대청 마루 입니다.

 

 

 

 

 

온돌이 깔린 건너방의 내부 전경 입니다.

 

 

 

 

 

내부 대청마루의 전경 입니다.

 

 

 

 

 

안방 마님의 새활 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가재 생활 도구가 그러 합니다.

 

 

 

 

 

부엌의 모습 입니다.

 

 

 

 

 

나오면서 찍었네요

출입 대문의 모습 입니다.

 

 

 

 

 

 

 

 

 

 

 

 

 

 

 

 

 

 

 

기념관 입구의 다산 정약용 선생의 상 입니다.

 

 

 

 

 

기념관의 전경 입니다.

 

 

 

 

 

 

 

 

 

 

 

 

 

 

 

 

 

 

 

거중기의 모습 입니다

정약용이 고안한 기계로 1796년 화성(수원성) 성곽을 쌓는데 이용 되었다

도르래의 원리를 이용하여 작은 힘으로 무거운 짐을 들어 올리는 장치이다.

정약용은 정조가 중국에서 들여온[기기도설] 이란 책을 참고하여 거중기를 개발 하였다.

 

 

 

 

화성을 거중기를 사용하여 쌓고있는 전경을 재현 하였다.

 

 

 

 

 

 

 

 

 

 

 

 

박물관 앞의 홍이포

설명은 아래 포토를 참조 해 주세요

박물관 내부는 시간이 부족하여 들어 가보지 못하여

아쉬움을 뒤로한체 돌아서야 했습니다 향해 있으시길 바랍니다.

 

 

 

 

 

 

 

 

 

 

 

 

 

 

 

 

 

 

 

다산 문화의거리 전경 입니다.

 

 

 

 

 

옛 나루터 입니다.

지금은 그 나루터에는 댐의 활용으로 물의 수위가 높아진 만큼

그 모습은 볼수 없었으나 그 자리에 남한강의 조망을 위한 전망대가 만들어져 있습니다.

 

 

 

 

 

전망대에서 바라본 남한강 전경 입니다.

맑고 푸름의 강을 바라보니 심신의 피로가 말끔히 사라지는듯 하였습니다.

 

 

 

 

 

혼상(渾象)입니다.

둥근 구면에 좌표를그려 하늘의 별과 별자라를 해당되는 위치에 표기하는 천문 의기 입니다.

 

 

 

 

 

 

혼천의(渾天儀) 입니다.

해와 달 오행성(수성 금성 화성 목성 토성)등의 위치를 관측하는 천문 기기 입니다.

 

 

 

 

 

 

신법지평일구(新法地平日구) 입니다.

이 해 시계는 초기에 제작한 평면 해 시계이다.

해 시계의 구조는 해 그림자를 받는 시반면과 해그립자를 나타내주는 영침으로 이루어져 있다.

시반면에는 13개의 시각선과 11개의절기선이 그어져 있어 영침의 그림자로서 계절을 알수있다.

이 신법지평일구는 보물 제 840호를 본 떠 제작 하였으며 시반면과 영침은 설치장소(북위37도 31분에 맞도록 제작 하였다.

 

 

감상 하시는데 도움이 되셨습니까?    다음은 실학 생태 동산을 소개할 예정 입니다.........

 

                                        기쁨과 행운 행복 모두가 여러분 곁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