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호국 지장사

2018. 6. 9. 09:06문화재를찾아서/사찰·성지


호국 영령들이 잠들어 있는 서울 국립 현충원의 호국 지장사



호국 지장사의 유래를 알아 본다.[글출처:호국지장사 블로그]


현재 국립서울 현충원 내 위치하여 있는 호국지장사는 신라 말 풍수지리설에 뛰어났던 도선(道詵) 스님이 창건하였다고 한다. 즉 도선스님이 북쪽으로 만행을 하다가 한강 언덕에 이르러 둘러보니 서기가 퍼져 나오는 곳이 있었다. 그래서 그곳에 가보니 칡덩굴이 엉켜지고 약물이 샘솟는 명당이므로 토굴을 짓고 갈궁사(葛弓寺)라 했다는 것이다. 그 후에는 폐허가 되다시피 한 갈궁사를 고려 공민왕 때 보인(寶印) 스님이 중창하고 절 이름을 고쳐 화장암(華藏庵)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호국 지장사 입구



그런가 하면 안진호(安震湖) 스님이 편찬한 봉은본말사지(奉恩本末寺誌)에는 사기(寺記)를 인용하여 “1577(선조 10) 왕이 창빈묘(昌嬪墓) 부근 산기슭에 절을 창건하고 창빈의 원찰을 삼으니 갈궁사가 바로 이것이다(朝鮮宣祖十年 ?寺於昌嬪墓附近山麓 爲昌嬪願刹 是葛弓寺)”라고 적고 있다. 그러나 창빈의 묘는 1578년 즉 선조 즉위 11년에야 양주(楊州) 장흥리(長興里)에서 이곳 동작리로 옮겨졌다. 그래서인지 안진호 스님은 창건에 대한 여러 설을 언급하며 이 시기에 지장사가 창건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하였다



지장보살 3000불단



현재로서는 화장사가 언제 처음 창건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일반적으로 전해지는 내용은 보인(寶印) 스님의 중창이후 1577(선조 10)에 선조의 생조모인 창빈 안씨(昌嬪 安氏)의 묘를 절 부근에 모시게 되자 그 원찰로 삼고 화장사(華藏寺)로 고쳐 불렀으며, 창빈묘의 조포사찰(造泡寺刹)로 지정하였다는 것이다.



이후의 연혁은 봉은본말사지(奉恩本末寺誌)에 자세히 전한다. 화장사는 1663(현종 4)에 중수를 하는 등 꾸준히 사세를 유지해왔는데, 영조 때 신경준이 지은 가람고(伽藍攷)에도 동작리에 화장암이 있다(在銅雀里縣北十五里)”고 기록하고 있다. 그 뒤 1862(철종 13)에는 운담(雲潭)과 경해(鏡海) 두 스님이 중건하였다. 1870(고종 7)에는 운담(雲潭)과 경해(鏡海) 두 스님이 경파루(鏡波樓)를 새로 지었으며, 1878(고종 15)에는 주지 서월(瑞月) 스님과 경해 스님이 큰방 등을 수리하였다. 1893(고종 30)에는 화주 경운(慶雲계향(戒香) 스님이 불상을 개금·개분하고 구품탱·지장탱·현왕탱·독성탱·산신탱을 봉안하였고, 1896년에는 칠성각을 새로 지었다.



약사여래 부처님



그리고 1906년에는 화주 풍곡(豊谷) 스님이 약사전의 불상을 개금·단청하고 후불탱·신중탱·감로탱·신중탱·칠성탱 등을 봉안하였다. 1911년에는 일제의 사찰령에 따라 봉은사의 말사로 편입이 되었다. 1920년에는 주지 원옹(圓翁)스님과 명진(明眞)스님이 큰방을 수리하였고, 1936년에는 주지 유영송(劉永松) 스님이 능인전(能仁殿)을 중수하였다. 한국전쟁 이후에는 국립묘지가 들어서자 수많은 유가족들이 호국영령을 위해 기도하는 사찰이 되었다. 그 뒤 1983년에는 혜성(慧惺) 스님이 주지로 부임하여 국립묘지에 안치된 호국영령들이 지장보살의 원력으로 극락왕생하도록 기원하는 뜻에서 절 이름을 호국지장사(護國地藏寺)로 다시 바꾸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호극 지장사를 오르는 입구의 보호수

수령 315년의 느티나무


호국 지장사에서는 많은 사회 공헌을 하고 있다.

현충원내 자매결연 묘역관리 및 헌화 봉사활동, 장학사업, 산사 음악회 등으로 사회에 이바지 하는 공헌도를 높여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