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주/소수서원의 가을

2016. 11. 10. 20:26어디로갈까/축제·공원·테마

소수서원(紹修書院)


사적 제55호로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 내죽리에 있는 서원이다.

한국 최초의 본격적 서원이며, 최초의 사액서원이다.


사진으로 보는 소수서원의 가을





우리나라 최초로 왕이 이름을 지어 하사한 사액서원
중종 38년에 풍기군수 주세붕이 백운동서원을 최초로 설립하였고, 명종 때 국왕으로부터 ‘소수서원’이라는 사액을 하사받았다. 조선 후기 대원군이 서원을 철폐하면서 남은 47개 서원 중 하나로, 매년 봄·가을에 제사를 지낸다.



최초로 국학의 제도를 본떠 선현을 제사지내고 유생들을 교육한 서원이었다. 풍기군수 주세붕이 유학자인 안향의 사묘를 설립한 후 1543년 유생교육을 위한 백운동서원을 설립한 것이 시초이다. 이후 경상도관찰사 안현이 서원의 경제적 기반을 확충하고 운영방책을 보완했다. 이 시기의 서원은 사묘의 부속적인 존재로서 과거공부 위주의 학교로 인식되고 있었다. 이황은 교학을 진흥하고 사풍을 바로잡기 위해서 서원 보급의 중요성을 주장하면서 사액과 국가의 지원을 요청했다. 이에 따라 1550년 '소수서원'이라는 현판을 하사받았다. 소수서원은 1868년 대원군이 서원을 철폐할 때에도 존속했다.
사적 제55호로 지정되었으며, 보물 제59호 숙수사지당간지주·국보 제111호 회헌영정 등과 141종 563책의 장서가 남아 있다.





















































서원은 조선시대 사림의 사상적 본거지이자 활동기반으로서 사림의 운명공동체로 강학(講學)과 선현(先賢)의 제향(祭享) 두 기능을 담당했다.

서원은 강학과 제향의 기능을 가진 점에서는 관학(官學)과 차이가 없었지만 제향의 대상이 공자와 그의 제자인 성현(聖賢)이 아닌 우리나라 선현(先賢)이라는 점과 중앙정부가 아닌 사림이 그 설립주체라는 점에서 차이를 가지고 있다 . 지방의 향교, 중앙의 사부학당, 성균관으로 이루어진 관학이 중심이었던 조선초기의 교육제도는 중기를 지나면서 세조의 왕위 찬탈반대로 인한 집현전 폐지와 연산군에 의한 성균관의 황폐화 등으로 국가지원의 부족에 부딪치고 결국 관학은 점차 교육기능을 상실하게 되었다.

이처럼 관학이 학교로서의 교육기능을 상실하게 되면서 학덕을 겸비한 유학자들은 개인적으로 서재(書齋), 정사(精舍) 등의 사학(私學)을 설립하여 학문을 보급하고 학문을 계승하였다.

중종반정 후 중종은 혼란을 수습하고 새로운 정치를 표방하면서 성균관을 중수하는 등 관학을 중심으로 한 교학진흥책을 추진하였지만 기대만큼 효과를 얻지 못하였다. 이에 조광조를 중심으로 한 신진 사림세력은 의리명분을 바탕으로 한 민심수습과 내적 인격도야를 추구하는 위기지학(爲己之學)의 학문풍토를 추구하며 도학(道學)정치에 기초한 교학진흥책을 제시하였다. 그 교학진흥책 중 하나가 바로 문묘종사(文廟從祀)운동이었다.
이는 사림계의 학문적 우위성과 정치입장을 강화해주는 측면과 함께 향촌민의 교화라는 명분을 가지는 것으로서 서원 발생의 토대를 제공하였다. 이후 선조 때에 이르러 사림파가 정치의 주도권을 잡으면서 서원은 본격적인 발전을 이루게 되었다.
이와 같이 서원은 도학을 이상으로 삼던 사대부 사림세력들의 정신세계가 반영된 조선시대 유교사회의 대표적 산물이다.

조선 성리학의 문화유산인 서원은 선비들이 학문을 연마하고 선현에게 제향을 올리는 곳으로 향촌사회를 이끌어가는 정신적 지주 역할과 아울러 후에 지방사림세력의 구심점이 되었으며 나아가 중앙 정치세력의 견제 기반으로서의 기능을 갖게 되었다. 조선중기 교육적 기능면에서 쇠퇴의 기미를 보이던 관학에 대응하여 새로운 교육활동의 중심지로 부상했던 서원은 과거시험과 법령의 규제에 얽매인 관학과는 달리 학문의 자율성이 존중되어 출세주의나 공리주의(功利主義)가 아닌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길렀던 민족교육의 산실이자 유교적 인재 배출의 요람이었다.
































봉안인물 글출처:영주시청

회헌안향 (晦軒 安珦, 1243~1306)

  • 처음 이름은 유(裕)요, 후일 향(珦)으로 고쳤으며 회암 주희(晦庵 朱熹)를 흠모하여 스스로 호를 회헌(晦軒)이라 했고 본관은 순흥이며 시호는 문성공(文成公)이다.
    안향선생은 소백산 정기를 받고 태어나 순흥이 배출한 위대한 인물이며 우리나라에 중국의 주자학(朱 子學)을 최초로 유입 보급해 이 땅에 유풍(儒風)을 진작한 장본인이다.

    그의 나이 16~18세 때에는 고향 순흥의 숙수사를 왕래하면서 독학으로 경서강독 등 수학에 전념하였으며 1260년(원종1년) 18세 되던 해 과거에 급제, 개성에서 관직생활을 시작하여 64세를 일기로 생을 마칠 때까지 도첨의중찬(都僉議中贊) 등 내외 요직을 두루 거친 명관(名官)이었다.

    1289년(충렬왕 15년) 11월에는 고려 유학제거(儒學提擧)가 되어 왕과 공주를 호위하며 원나라에 들어가 주자전서(朱子全書)와 공자, 주자의 화상(畵像)을 가지고 이듬해 3월에 돌아와 주자학(朱子學)을 연구하였다.

    이후 1303년(충렬왕 29년)에는 국학학정(國學學正) 김문정(金文鼎) 을 중국 강남에 보내어 공자와 72제자의 화상, 문묘에 사용할 제기, 악기와 육경(六經), 제자(諸 子) ,사서(四書), 주자서(朱子書) 등을 구해오게 하였다.1304년 6월 국학의 대성전이 완성되자 거기에 공자를 비롯한 선성(先聖)들의 화상을 모시고 문묘의 제도를 갖추게 하였다.
    그는 오늘날의 육영재단에 해당하는 섬학전(贍學錢)을 설치해 장학사업을 펼쳐 인재양성을 장려하고 성리학보급에 활력의 샘줄기를 터놓았다.
    한편 선생이 살던 고려후기는 불교의 폐해와 무인(武人)의 장기집권 및 몽고의 침입과 홍건적의 난 등 이민족의 잦은 침입으로 대내외적으로 국운쇠퇴기였다.
    이러한 때에 안향 선생은 중국 원나라에 가서 새로운 사상인 주자학을 도입해 새로운 학풍으로 어지러운 통치기반을 안정시키기 위해 전력을 다했다. 안향 선생의 이러한 노력 덕분에 마침내 주자학을 수양(修養)과 치세(治世)의 원리로 삼은 성리 학자들이 중심이 되어 훗날 새로운 왕조 조선을 개창하게 되고 조선왕조가 성리학을 나라의 통치이념으로 삼게 되면서 민족의 스승으로, 동방 도학(道學)의 비조로 추앙받게 되었다.
    선생의 묘소는 오늘날 국립묘지에 해당하는 경기도 장단군 진서면 눌목리(訥木里) 구정동(口井洞)에 있다. 한편 1917년에는 중국 공자의 77대손인 공덕성(孔德成) 씨가 회헌 안향선생을 ‘ 안자(安子)' 로 높이 찬양하여 지은 찬문과 안자묘(安子廟) 편액친필글씨를 보내왔다.
    또한 공자의 76대손인 공영 이(孔令貽)씨는 회헌 안향의 신도비명(神道碑銘)을 지어 보내왔다.
    공덕성씨와 공영이씨가 보내온 안자묘 편액친필글씨와 회헌 안향의 신도비명은 1977년 경기도 시흥시 의왕읍에 안자묘 건립과 함께 그곳에 보존되고 있다.

  • 성인의 학문을 모아 집대성한 분은 공자이시고
  • 현인의 학문을 모아 집대성한 분은 주자이시고
  • 공자와 주자를 조종으로 삼아 동방성리학을 집대성한 분은
  • 고려의 안자(安子: 안향 선생을 높여 칭한 말)이시다.
  • ( 集群聖之大成者孔子也 )
  • ( 集群賢之大成者朱子也 )
  • ( 祖孔宗朱以啓東方之聖學者安子也)
  • - 중국 공덕성씨가 안향선생을 찬양한 찬문 全文


근재안축 (謹齋 安軸, 1287~1348)

  • 고려말기 문신.
    고향죽계(竹溪)를 세력기반으로 하여 중앙으로 진출한 신흥유학자(新興儒學者)로 재능과 학문이 뛰어났다, 자는 당지(當之), 호는 근재(謹齋), 본관은 순흥(順興).
    문과에 급제하여 전주사록(全州司錄), 사헌규정(司憲糾正)을 지내고 1324(충숙왕 11) 원(元)나라 제과(制科)에도 급제하여 개주판관(蓋州判官)으로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고려에 돌아와 성균학정(成均學正)을 거쳐 충혜왕(忠惠王)때 강원도 존무사(存撫使)로 파견되었으며, 이 때 충군애민의 뜻이 담긴 "관동와주 關東瓦注"를 남겼다.
    1332년(충숙왕복위 1) 판전교(判典敎), 지전법사(知典法事) 재직시 파면당햇다가 전법판서(典法判書)로 복직도 있었으나 내시의 미움을 받아 파직되는 등 파면과 복직을 되풀이하였다.
    충혜왕이 복위한 뒤 다시 전법판서, 감찰대부(監察大夫)에 등용되었으며, 상주목사(尙州牧使),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 첨의찬성사(僉議贊成社)등을 지내고 1347년(충목왕 3)에 판정치도감사(判整治都監事)가 되어 양전(量田) 행정에 참여했다.

    그뒤 감춘추관사(監春秋館事)로 민지(閔漬)가 지은 (편년강목 編年綱目)을 이제현(李齊賢)등과 함께 고쳐 엮었고, 충렬, 충선, 충숙 3조의 실록 편찬에도 참여하였으며 경기체가인 (관동별곡 關東別曲), (죽계별곡 竹溪別曲)을 남기는 등 학문과 문장이 높았으며 저서에 (근재집 謹齋集)이 있다.
    흥녕군(興寧君)에 봉해진 뒤 죽어 제향 되었으며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안보 (安輔, 1302~1357)

  • 고려말기 문신.
    자는 원지(員之), 본관은 순흥(順興).
    1320년(충숙왕 7) 문과에 급제하고, 경주사록(慶州司錄), 수찬, 편수관등을 지냇다. 1345년(충목왕 1) 원(元) 나라 제과(制科)에 합격하여 요양행중서성조마겸승발가각고(遼陽行中書省照磨兼承發架閣庫)로 있다가 귀국한 뒤, 전법판서(典法判書), 동지공거(同知貢擧), 정당문학(政堂文學), 동경유수(東京留守)등을 지냈다
    이색(李穡)은 묘지에서 "선생은 성품이 활달하고 사기를 즐겨 읽었으며 일함에 있어 대세(大勢)를 쫒아 조금도 치움침이 없었고 화려함을 버리고 뜻을 전달함을 취한 뿐 이었다"라고 평하고 잇다.
    안축(安軸)의 동생으로 1544년(중종 39)에 함께 제향되엇으며,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신재 주세붕 (愼齎 周世鵬, 1495 ~ 1554)

  • 주세붕 선생은 조선시대의 석학이며 도학자로 호는 신재(愼齋), 본관은 상주(尙州), 시호는 문민공(文敏公)이며 최초의 사액서원 소수서원의 시초인 백운동서원의 창건자이다. 경상남도 함안군 칠원(漆原)면 출생으로 1522년(중종 17) 생원 때 별시문과(別試文科) 을과에 급제한 뒤 정자(正字)가 되고, 검열(檢閱)·부수찬(副修撰)을 역임하다 김안로(金安老)의 배척을 받고 강원도도사(江原道都事)에 좌천되었다.
    주세붕 선생은 풍기군수로 부임한 이듬해인 1542년(중종37년) 평소 흠모하던 고려말의 학자 안향선생을 배향하고 향촌교화를 위해 안향선생이 어린시절 수학했던 순흥 숙수사 터에 서원을 건립한다. 서원을 통하여 사림을 교육하고 아울러 사림의 중심기구로 삼아 향촌의 풍속을 교화 하려는 목적으로 유생들과 강론(講論)하는 등 열의를 보였다.
    주세붕 선생이 이곳에 사묘를 건립한 것은 안향 선생의 영정을 모셔오는 것과도 관계가 있다. 1456(세조 2년) 9월 순흥에 유배된 세종의 다섯째 아들 금성대군(錦城大君)과 순흥부사 이보흠 (李甫欽, ?-1457)의 단종 복위 밀모사건으로 1457년 순흥부가 폐지되면서 풍기군의 행정구역 으로 편입되고,
    이에 순흥향교가 폐쇄됨에 따라 안향 선생의 영정은 서울의 순흥안씨 대종가로 옮겨져 봉안되기에 이른다.
    이와 관련하여 주세붕 선생은“공의 영정이 순흥부 향교에 봉안되었는데, 정축(丁丑,세조3)의 변고로 순흥부가 없어지자 한성의 대종가로 옮겨 봉안하였다.
    내(주세붕)가 공의 종손 안정의 집에서 공의 영정을 본 적이 있었는데, 멀리서 바라보면 엄연하고 가까이 다가서면 온화하니 진실로 대인군자의 용모로서 생전의 모습을 친히 보는 듯하여 마음속에 길이 간직하고 있었다.....” 라고 『회헌선생실기(晦軒先生實記)』에 기록하고 있다.
    이후 주세붕 선생은 1544년(중종 38년) 8월 11일 창건된 백운동사당에 안향 선생의 영정을 모 시고 「죽계사」3장을 낭독하며 경건히 제례(祭禮)를 올렸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동쪽에 죽계수 서쪽에 소백산 그 사이에 공을 모신 사당
    백운이 가득찬 골자기에 앞 길이 희미하네,
    시냇물에는 고기 놀고 산에는 잣나무
    여기는 공이 놀던 옛 터인데 어이하여 돌아오지 않으시나,
    돌아와 주오 돌아와 주오 나를 슬퍼잖게
    서쪽에는 소백산 동쪽에는 죽계수 산 위에는 구름
    강물에는 달빛 고금에 변함 없네
    공이 오실 적에는 옥규를 타고,
    더러는 난조를 타고
    나의 술잔을 드시고 나의 정성에 흠향하시어
    기쁨을 다하소서.
    공이 옛적 낳기 전에 유도가 어두웠고
    윤리가 땅에 떨어져 구름 연기에 쌓인 황혼이었네
    공이 나신 후로 삼한이 일신되어
    푸른 하늘 태양처럼 의리의 도가 높여졌네
    훤출한 사당에 공의 영정 봉안되니
    죽계수는 더욱 맑고 소백산은 더욱 높아.

    또한 주세붕 선생은 백성을 위하는 후덕한 목민관으로도 유명하다.
    당시 백성들이 나라에 바치 는 산삼 때문에 어려움이 많은 것을 알고 소백산에서 산삼종자를 채취하여 인공재배를 장려, 풍 기 땅에 재배삼을 처음으로 성공시킨 인물이다.
    이러한 주세붕 선생의 선정(善政)을 기리고자 훗날 관아 앞에(현 풍기읍 사무소 내)는 보기 드물 게 선정비를 세웠다.
    또한 문장에도 뛰어나 주옥같은 글을 많이 남겼는데 시가(詩歌) <도동곡(道東曲)> <태평곡(太 平曲)>을 비롯 『죽계지(竹溪誌)』 『무릉잡고(武陵雜稿)』 등을 대표적인 저술로 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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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이황 (退溪 李滉, 1501 ~ 1570)

  • 퇴계 선생은 풍기군수로 부임하여 백운동(白雲洞 ) 서원을 소수서원으로 사액(賜額) 받게 하셨고, 이 서원에서 직접 수 많은 제자들을 길러 내셨다.
    또한, 신분과 계급을 떠나 가르침을 원하던 무쇠장이 배순을 제자로 삼아 유교무류(有敎無類)라는 평민교육을 몸소 실천하신 분이다.

    또한 주세붕선생이 서원을 세워 안향선생을 높이자, 퇴계는 회헌선생의 수제자인 역동 우탁(易東 禹倬)을 기리고자, 역동서원을 세워 안향선생의 인격과 학풍을 진작시켰으며 조선 성리학(性理學)을 꽃 피우셨다.

    회헌선생의 ‘유국자 제생문(諭國子諸生文)'을 보고 퇴계는 ‘유사학 사생문(諭四學師生文)'을 지었으며 안축의 죽계별곡을 보고 ‘도산12곡'을 남기셨으며, 주희(朱熹)의 ‘무이구곡(武夷九曲)'을 본따 백운동 서원에서 소백산으로 오르며 ‘죽계9곡'을 명명(命名)했다.

    1568년 이황이 경연(經筵)에 입시하여 성리학을 강의하고 심법(心法)의 요점을 설명하기 위하여 여러 성리학자의 도설(圖說)에서 발췌하여 각 도식 아래 자신의 의견을 서술하여 임금에게 강론하였는데, 이것이 성학십도(聖學十圖)이다.
    이 것을 저술한 직접적인 의도는 17세의 어린 임금인 선조를 성왕(聖王)으로 인도하려는 데 있었으나, 선조 한 사람만을 위해 지은 것은 아니라 성인을 배우고자 하는 모든 사람을 위한 뜻도 있었다.
    이 성학십도(聖學十圖)의 목판본은 소수박물관에 유일하게 남아있다.

    영주는 퇴계가 형인 ‘온계'와 상봉하던 죽령고개와 처가댁이 있던 푸실(草谷)마을, 외가동네인 영천고을, 퇴게, 아들, 손자까지 3대가 공부하던 제민루 의국(醫局), 부인 무덤, 무쇠장이 제자 배순 유적 등 퇴계와 관련된 많은 유적지가 전해오는 퇴계학(退溪學)의 시원(始原)이 되는 곳이다

    고인도 날 못보고 나도 고인 뵌 일 없네
    고인을 못 뵈어도 가시던 길 앞에 있네
    가시던 길 앞에 있거든 아니 가고 어쩌리
    - 안향 선생을 흠모하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