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암 송시열 유적 (尤庵 宋時烈 遺蹟)

2013. 8. 29. 06:47카테고리 없음

화장늘 아리랑의 블방을 방문하여 주시는

                      여러분께 심심한 감사의 말씀 올립니다,

 

이번 포스팅은 우암 송시열 유적을 살펴 보기로 합니다.

 

소재지 : 충청북도 괴산군 청천면 화양리

사적 제 417호

 

이 유적은 조선 성리학을 계승하고 완성한 우암 송시열(1607~1689)의 애국 사상과

중국 청나라의 무력에 굴하지않는 민족 자족정신이 깃든 곳이다,

 

화양서원은 송시열이 은거했던 장소에 세워진 서원으로서 조선시대 학자들의 모임

장소 였으며. 만동묘는 중국 명나라 황제(신종 神宗. 의종 毅宗)의 위폐를 모신 사당

으로 예터가 잘 남아있다. 또한 주변에는 송시열의 묘소와 신도비 암서재 읍궁암

외에 암서재 주변의 암벽에 충효절의. 비례부동 등이 새겨져 있어 반청애국 사상을

단면에 보여주고 있다,

 

건립이후 조선조 말까지 조선 성리학의 중심지였던 이 유적은 경술국치(庚戌國恥)

후 일제에 의하여 철저하게 왜곡되고 파괴 당하는 수난을 겪은 곳이기도 하다,

 

 

 

금사담과 암서재 전경

 

 

 

우암 송시열의 초상화 이 초상화는 국립박물관에 소장중,

 

 

 

 

우암 송시열 종합 안내도

 

 

 

 

 

 

 

 

 

 

존사정

 

 

 

풍천정에는 선비들의 공자왈 맹자왈 열심히 목청높혀 낭독하고 있습니다.

 

 

 

풍천정 전경

 

 

 

전통 흙 기와 담장을 보여 줍니다

 

 

 

중반청입니다

이곳에서는 다과 체험과 예절교육의 실 입니다.

 

 

 

우측으로 보여지는곳은 사당 이구요 좌측으로는사당을 출입하는 승산문 입니다

 

 

 

 

 

 

 

 

 

 

 

 

만동묘의 전경

 

 

 

 

비각전경

이 비는 만동묘를 새우게된 취지와 제사를 모시고 있는 명나라의 신종과 의종을

추모하는 뜻을 기록한 것이다. 영조 23년(1717)에 이재가 글을 지어 세웠으며 순조

14년(1814)에 다시 세웠다,

 

만동묘는 송시열의 유언에 따라 권상하기 임진왜란 떄 우리나라를 도와준 명나라의

신종과 의종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하기 위해 숙종 29년(1703)에 새운사당이다.

초기에는 나라에서 제사 지내는 것을 허락 하였으나 이곳 유생들의 횡포가 심하사

고종2년(1865)에 나라에서 대보단에 모시고 만동묘를 철폐시켰다.

 

그 후 유생들의 끈질긴 건의를 받아들여 다시 향사켸 하였으나. 일제에 의해1917년

에 제사를 금하게 되었다. 1937년에는 위패와 제사 용구를 불사르고 묘정비는 비문을

알아보기 힘들게 쪼아버렸더니. 1942년에는 묘당등 일체의 건물을 철거하여 괴산

경찰서 등을 짓는데 사용하였고. 묘정비는 땅에 묻어 버렸다.

1983년에 괴산군에서 묘정비를 찾아 다시 세우고 주변을 정비 하였다.

 

 

 

만동묘

 

 

 

 

 

 

 

성공문에서 내려다본 외삼문 전경

 

 

 

 

 

 

 

성공문앞의 높은 돌계단

 

 

 

전체전경 외부에서 바라봅니다.

 

 

 

금사담과 암서재

맑은 물과 깨끗한 모래가 보이는 계곡속의 못 이라는 의미로 금사담 이라 불리우며

화양구곡 중에서 중심이 되는 곳이다.

 

조선 숙종(1661~1689)때 우암 송시열(1607~1689)정계를 은퇴한후 이곳 반석위에

집을지어 암서재라 하고 이곳에서 은거하며 학문을 연구하고 수양하였다.

 

이건물은 그간 여러차례 중수를 거쳤고 현재의 건물은 1986년에 중수 되었다,

 

 

 

 

 

 

 

 

읍궁암(泣弓岩)

이 바위는 화양구곡 중 제3곡으로 우암 송시열 선생이 조선시대 효종대왕(1619~1659)

께서 북벌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41세의 젊은 나이에 승하하신 것을 크게 슬퍼하며

새벽마다 한양을 향하여 활처럼 엎드려 통곡하였다. 하여읍궁암이라 부른다.

 

 

 

 

화양서원 묘정비

화양서원은 조선숙종22년 우암 송시열 선생의 영정을 모시고 재향하기 위해 건립된 것으로

창건되던 헤에 사액 되었으며. 숙종42년 어필로 현판을 달았다

전국의 사액서원 중에서도 가장 이름있고 위새가 당당한 서원 이었으나. 많은 논란속에

철종9년에 목주촌이 폐쇄되고 고종8년 훼철 되었다

 

 

 

우리의 문화유산 입니다

이곳 속리산 국립공원 화양구곡 중

가장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어

많은 관광객으로 초만원을 이루는

각별한 유적지라고 생각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