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8. 9. 07:27ㆍ카테고리 없음
구미 금오산 채미정
경북 구미시 남통동에 있는 조선 후기의 정자. 정면 3칸, 측면 3칸의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 경상북도 기념물 제55호. 고려 말 학자 길재의 충절과 학문을 추모하기 위하여 1768년(영조 44)에 창건되었다.
경상북도 기념물 제55호. 고려 말 학자 길재(吉再)의 충절과 학문을 추모하기 위하여 1768년(영조 44)에 창건되었다.
계류에 걸린 석교를 건너 흥기문을 지나면 우측에 채미정이 있고 좌측에는 구인재(救仁齋)가 있다. 후방에는 길재의 충절에 감격하여 읊은 숙종의 어필 오언구(五言句)가 보존되어 있는 경모각과 비각이 나란히 서 있다.
채미정은 중앙 1칸은 온돌방으로 꾸미고 사방 둘레에 모두 우물마루을 깔아 대청으로 꾸몄다. 온돌방의 사면에는 각각 2분합 들문을 설치하였으며, 대청 사면이 벽체 없이 개방되어 있다. 잘 다듬은 장대석 기단 위에 원통형으로 치석한 화강석 주초를 놓고 원주를 세웠다.
주상의 2익공은 쇠서[牛舌] 위에 연봉(蓮峰)을 조각하였고, 귀포는 귀한대와 함께 2제공 위에 용두를 두었으며, 주간에는 초각 화반(花盤)을 1개씩 배치하였다.
가구는 5량가로서 퇴량을 양봉이 받았고, 중앙 온돌방의 기둥이 고주인 관계로 퇴량 위에 접시대공을 놓아 외기틀을 받고 있다. 구인재는 정면 4칸, 측면 3칸으로 중앙 2칸은 우물마루를 깔았고, 양측면은 2통칸 온돌방으로 꾸며 전퇴를 둔 초익공의 백골집[白骨家 : 칠을 안 하고 목재면을 그대로 둔 집]이다.[출처:한국민족대백과사전]
채미정에서 본 금오산 정상
오백년을 이어온 고려왕조가 국운이 다해 결국 멸망했다. 많은 인사들이 새롭게 열린 나라 조선의 공신이 되어 개국의 깃발 아래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그러나 새로운 나라의 창업에 동참하지 않고 이미 무너져버린 고려왕조에 끝까지 충절을 지킨 사람들이 있었다. 세상에 다시 나오지 않을 각오로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간 사람을 비롯하여 두 나라, 두 임금을 섬기지 않겠다고 선언한 이들이다. 멸망한 고려에 충절을 지킨 충신으로 잘 알려진 삼은(三隱)도 이들에 속하는 대표적 인물이다.[본문글출처:우리명승기행]
길재(吉再)는 바로 그 삼은 중 한 사람이다. 고려 말에서 조선 초기의 학자로 그는 야은(冶隱), 또는 금오산인(金烏山人)이라는 호를 즐겨 사용했다. 조선 개국 후 2대 정종 임금 시절, 당시 왕세제였던 이방원이 그를 불러 태상박사에 임명하려 했다. 그러나 그가 글을 올려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뜻을 펴니, 이방원은 그 절의를 갸륵하게 여기고 예를 다해 대접하여 보내주었다고 한다. 그 후 길재는 고향인 금오산 아래에 머물렀다.
하마비
야은길재의 회고가 중에서...
교과서로 배운 기억들 니시는거죠!
석교와 홍기문
계곡 위의 다리를 건너면 입구인 홍기문이 있고, 이 문을 직선으로 지나는 축의 끝부분에 경모각이 위치한다. 또한 우측에는 채미정, 좌측에는 구인재가 있다.
석교 전경
홍기문 전경
채미정 전경
연한 초록색을 두룬 늦은 봄의 채미정이다. 한가운데 방을 두고 툇마루를 두른 구조로 방문은 사방을 모두 들어 올릴 수 있는 들문으로 되어 있다.
채미정은 벽체가 없고 16개의 기둥만 있는 정자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한식 건물로 한가운데 1칸을 방으로 만들고 ‘ㅁ’ 자로 우물마루를 두른 건물이다. 정자의 정중앙에 자리한 방은 온돌로 되어 있어 추운 계절에도 사용할 수 있다. 방문은 들문의 형식으로 사방에 2짝씩 달려 있는데 모든 문을 들어 올리면 방이 없는 무실형 정자의 모습으로 변한다. 채미정의 경역은 정문인 흥기문(興起門)을 시작으로 석축 상단에 가로로 쌓은 담장으로 구획되어 있다. 이곳에 숙종의 어필 오언시(五言詩)가 걸려 있는 경모각(敬慕閣)과 구인재(求仁齋), 비각 등의 건물이 위치하고 있다. 채미정으로 가려면 깊은 계곡 위에 놓인 다리를 지나야 한다. 다리 아래로 흐르는 계류와 울창한 수목들은 채미정과 어우러져 아름다운 경관을 이룬다. 특히 채미정에서 바라보는 금오산의 풍광은 명승으로서의 경관미를 한층 돋보이게 한다
구인재 전경
인의를 저버린 군주, 새로운 왕조를 섬길 수 없다며 불사이군(不事二君)을 고집한 백이와 숙제는 야은 길재가 사표(師表)로 삼고자 한 인물이다. 신하가 주군을 멸하고 세운 조선에서 길재는 백이와 숙제가 간 길을 택하고자 했다. 이처럼 은나라에 대한 충절을 지켰던 백이와 숙제의 고사에서 비롯된 명칭인 ‘채미정’은 길재의 충절을 상징한다.
채미정이 위치한 금오산은 경관이 빼어나고 힘과 기상이 넘치는 바위산이다. 불교를 신라에 처음 전파한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이곳을 지나다가 저녁노을 속으로 황금빛 까마귀가 나는 것을 보고 금오산이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 ‘채미’는 고사리를 캔다는 뜻으로 중국 주나라의 전설적인 형제 성인 백이(伯夷)와 숙제(叔齊)에 관한 고사에서 유래된 말이다.
경모각 전경
길재는 1353년 구미에서 태어나 당시 관료로 있던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개경으로 가서 이색, 정몽주, 권근 등의 문하에서 학문을 익혔다. 1374년 생원시, 1383년 사마감시, 1386년 진사시에 합격한 후 성균박사를 지냈다. 고려의 쇠망을 짐작한 후 늙은 어머니의 봉양을 구실로 사직하여 낙향했다. 어머니에 대한 효성이 지극했으며 세속의 현달에 뜻을 두지 않고 성리학 연구에 매진했기 때문에 그를 본받고 가르침을 얻으려는 학자가 줄을 이었다고 한다. 김숙자, 김종직,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등이 그의 학맥을 이은 유림이다. 1419년(세종 1) 67세를 일기로 생을 마친 길재는 금산의 성곡서원, 선산의 금오서원, 인동의 오산서원에 향사되었다.
비각 전경
왕권이 교체되는 난세에도 고려에 절의를 지키고 학문에만 정진한 야은 길재는 사후, 오히려 조선에서 충절(忠節)이라는 시호를 받으면서 충신이 되었다. 또한 후학들에 의해 학통을 잇게 하는 중심인물로 위상을 지니게 된다. 채미정은 충절을 지키며 오직 학문에 정진한 야은의 올곧은 선비로서의 향기가 묻어나는 명승이다.
홍기문에서 바라본 채미정 들어오는 입구 전경
채미정 종합 안내도
채미정 주위에는 곧은 소나무가 빼곡히 들어서 있다.